◆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81) 이영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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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청탁을 받고 그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 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유명인사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들을 골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쓰고 있었다. 대통령, 국무총리, 학자, 성직자, 장성 그 리고 시인, 화가, 소설가, 사회사업가등 저명한 인사들만 골라서 썼다.
그러나 돌연 조선일보가 그 칼럼을 중단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나의 홈 페이지에 그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이승만이나 정주영같이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이영일이라는 사람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일제 때 〈장한몽〉이라는 소설이 많이 읽혔는데 그 주인공이 이수일과 심순애였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이수일하면 심순애를 생각하고 심순애를 생각하면 이수일을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영일이라는 이름은 그의 짝 장선용을 생각하 게 한다. 나는 장선용을 더 잘 안다. 장선용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 를 훌륭한 성적으로 마치고 내 누님이 총장으로 있던 시절 이대 학무처에서 여러 해 근무하였다.
그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장선용은 키가 작아도 매우 작아서 이영일과 맞선 을 봤을 때 장선용은 저렇게 키 큰 남자가 있나 하였다니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영일은 1934년 1월 18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 시대의 엘리트였는데 아들이 없는 것이 한 이었다. 그 아버지의 첫 애가 딸이었다.
큰 희망을 가지고 둘째를 기다렸다. 둘째도 딸이었다. 셋째도 넷째도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도 딸이었다. 최후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이영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한번 노력을 했다.
그 부모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왜? 아버지의 나이가 53세 나 되었 으니까. 그렇게 하여 태어난 갓난아기가 아들이었고 그의 이름이 이영일이었다.
그는 월반을 할 만큼 총명하여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불온한 벽보를 붙이다 북조선의 보안요원에게 발각되어 소년 수용소에 끌려 갔다. 그 어린 것이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왜? 죽지는 않았으니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인 1조가 되어 가마니 7장을 다 짜야 옥수수 한 컵 정도를 받아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배고픈 삶을 1년이나 살아야했다. 그는 풀 려나서 그 후에 열심히 공부하여 수능시험에 만점을 받아 김일성 메달을 받 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대학에 갈 실력이 충분하여도 출신 성분이 좋 지 않아 전문학교 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이북의 실정이었다. 그가 갈 수 있 었던 학교는 김일성대학이 아니고 평양 의학전문 학교였다.
그런데 뜻밖에 사건이 발생하였다. 1950년 6월 23일 학생들을 모두 차에 태워 일선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에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준비 하면 타고 오라고 하면서 그들은 먼저 떠나고 다음 날 모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누이들이 그 동생을 데리고 도망가서 큰 독 안에 숨겨두고 그는 그 독안에서 두 달을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경험을 하면서 1950년 말할 수 없이 추운 날 이영일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남쪽으로 도망가는 그 길 밖에 는 없었다.
월남 한 뒤 그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홍천에서 근무 하면서 중공군의 남침으 로 모두 도망간 빈 집에 들어가 거기 있던 영어사전을 한권 발견하고 가지 고 나와 영어공부에 몰두하였다.
그 영어 사전을 한 장씩 찢어서 다 외울 만큼 영어의 도사가 되었다. 군의 도움으로 샌디에고에 있는 미해군 특수학교에서 1년 공부를 하고 돌아와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7년을 복무하였다.
제대 후 3년을 공부하여 검정고시 합격했고 서울공과대학에 입학, 제대로 졸업장을 받았고 그 뒤에는 석유공사에 입사하여 호주에 가서 1년 또 연수 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1966년 그는 반도체 회사 페아차일드의 입사하여 한국 반도체 제작에 일선 에 서기도 하였다. 그 뒤에 미국 본사로 전근하였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지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는 한국의 사장이 되어 돌아왔다. 60세에 회사를 그만 두었지만 아직 힘이 있어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 70 에 은퇴하였다,
지금은 장미를 키우고, 정원을 가꾸고, 채소재배를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 사이에 그의 ‘영원한 동반자’ 장선용은 멀리 사는 며느리에게 보내 주던 요리 편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어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 하였다.
뜻밖에도 그 책은 지난 25년간 한국 요리 책으로는 유례없는 베스트셀러로 지 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 요리 전도사로 활약 하고 있다.
그가 펴낸 영문판 〈A Korean mother’s Cooking Notes〉는 세계 최대 인터 넷 서점 아마존에서 ‘한국 요리 최고의 레시피’로 선정되어 전 세계에 그 이름 을 널리 알렸다. 대단한 여자이다.
DNA가 이토록 각별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아들 둘을 낳고 아직도 서 로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인생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한다. |
◆2019/07/06(토) 무지개 비슷한 깃발 (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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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비슷한 깃발
1969년 6월 28일, 미국 뉴욕 맨하탄, 그린위치 빌리지에 있는 Stonewall Inn이라는 어느 게이바에서 큰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그 곳은 동성애 남 녀가 주로 모이는 술집이었는데, 경찰이 그 곳을 덮친 것이었다.
거기 모였던 동성애자들은 경찰의 곤봉을 맞는 폭행도 당하고 경찰에 끌 려가기도 했다. 이에 반발하는 큰 폭동이 그 다음날 벌어져서 6. 28이 역 사적인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시작 된 날이 되고 말았다.
지난 주 6월 28일, 그 사건의 50주년을 기념하여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찬 양자들이 집회를 갖고 그들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나는 TV를 통해서 그 광경을 시청했지만 그들의 상징인 6색 깃발이 물결치고, 화려하게 차려입 은 남녀가 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서로 껴안고 입맞춤을 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에 나 같은 사람은 갈 수도 없겠지만, 간다 고 해도 그들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억압 받고 탄압 받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의 날이 아닐 수 없겠으나, 어쩌다 세상이 이 꼴이 되었는지 우리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성별을 조사할 때 ‘남’ ‘여’ ‘기타’라고 해야 하는 날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대구에서도 이 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여 집회가 있었다고 들 었다. 동성애의 경향을 타고나는 사람이 75억 세계인구 중에 얼마나 되는지 나는 모른다. 과연 무엇이 정상인지, 정상을 정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왔으니 우리들의 처신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김동길 |
◆2019/07/05(금) 손자 망령 날 때까지 (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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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망령 날 때까지 옛날 시골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 옛날에도 할아버지 보다는 할머니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60세를 넘기기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리고 망령이 난 늙은이들이 드물긴 했지만 시골 마을에서도 더러 눈에 띠곤 하였다. 망령 난 어느 집 할머니는 채소밭에 비료를 준다는 걸 장독 대에서 된장을 퍼다가 비료로 준 일도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는 며느리를 효부라고 하였다.
당시 시골 사람들에게 가장 지독한 악담이 “너의 손자 망령 날 때까지 살아 라”라는 욕이었다. 요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알츠하이머라는 무서운 병 에 걸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노후를 두고 한 개인의 가장 큰 걱정이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것이다.
어떤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 <황홀한 사람>이라는 책이 있는데, 망령난 시 아버지를 돌보는 어떤 집 며느리의 이야기이다. 그 책에는 가장 황홀한 삶 을 사는 사람은 그 며느리의 돌봄을 받고 사는 그 시아버지라는 것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환자처럼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다시 순진해져서 부모를 의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보살 핌을 받고 살았던 어렸을 때처럼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농촌에서 60세가 넘어 70세를 바라볼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했는데 오늘의 주제로 보면 망령이 난다는 일이 얼마나 저주 스러운 일인가를 잘 알면서도 미운 사람에게 “너의 손자 망령 날 때까지 살라”고 하는가? 세상에서 제일 못된 욕이 아니겠는가.
김동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