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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민정음’ 유감

조 쿠먼 2019. 6. 26. 06:10

‘야민정음’ 유감

 

 

황성규 문화일보 논설위원

요즘 ‘괄도네넴띤’을 모르면 신세대 아닌 쉰세대로 분류될 것이다. 식품 기업 팔도가 비빔면 출시 35주년을 기념해 지난 2월 선보인 이 상품은 지금까지 1000만 개나 팔렸다고 한다. 외국어 같기도 한 이 상표는 ‘팔도비빔면’의 한글 자음과 모음을 글꼴이 비슷한 다른 자모로 바꿔 쓴 것이다.

 

얼핏 보면 착시현상 때문에 같은 단어로 인식되는 데서 착안한 누리꾼들의 조어를 차용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 머통령과

대통령이 같은 글자로 보이고, 댕댕이와 멍멍이가 비슷 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댕댕이가 눈에 익은 누리꾼들은 그 표현이 멍멍이

보다 ‘더 커엽게(귀엽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 원조는 ‘辛’(신)라면을 ‘푸’라면이라고 한 게 아닐까 싶다. 한글은 깨

 

쳤으나 한자를 모르는 어린이가 그렇게 읽은 데서 시작됐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어린이 독법 같은 그런 어문 파괴 표현이 지금 사회관계망(SNS)

한쪽에서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스띠귀(스티커), 공71청정71(공기

청정기)은 점잖은 표현에 속한다.

 

글자를 90도 회전하고 바꿔서 비버를 뜨또라고 하거나, 180도 뒤집어 눈

물을 곡롬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영문으로 ‘KIM’이라 써 놓곤

‘즐’이라고 읽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애교 섞인 개그 정도로 봐 줄 수도

있다.

 

자음을 아예 ‘ㅅ’과 ‘ㄱ’ 두 가지로 대체해서 ‘헉, 대박!’을 ‘석, 새각!’으로

표기하는 데 이르면 뜨악해진다. 숫제 초성만 따서 신세계를 ‘ㅅㅅㄱ’이

라고 하거나, ‘이거 레알 반박 불가’를 ‘ㅇㄱ ㄹㅇ ㅂㅂ ㅂㄱ’이라고 표기

하는 데 이르면 할 말을 잊고 만다.

온라인 세상의 이러한 문법 파괴 표기를 일각에서는 야민정음, 초성체,

쓱어체라고들 한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뜻글자 아닌 소리

글자인데, 이런 표기들을 보면 한글이 그림글자인가 하는 의문마저

갖게 된다.

 

한글의 정체성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이런 풍조는 이른바 Z세대 또는 밀

레니얼세대라는 청소년들의 발랄한 ‘언어유희’ 정도로 치부하고 넘길

일이 아니다.

 

세대 간의 소통 단절을 더 심하게 하고 어문법을 파괴하기도 하는 만큼

적절한 금선(禁線)이 필요하다. 그 선을 법으로 만들기 전에 저마다의

절제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선진 SNS 문화를 꽃피운 것도 쓰기 쉬운

 

훈민정음 덕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