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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건 신고제

조 쿠먼 2019. 11. 4. 05:43

멀리건 신고제

 

[중앙일보] 입력 2019.11.04 00:16

 

박태희 산업2팀 기자

 

기업인 네 명이 골프 모임을 계획하면서 룰을 정하다 이런 얘기가 오갔단다.

“멀리건은 어떻게 할까요.”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거, 허가제 말고 신고제

로 합시다. ‘나 멀리건 치겠소’ 한마디만 하면 자기 마음대로 다시 칠 수 있기로”.

좀 전까지 규제 현실을 얘기하며 답답함을 토로하던 이들 사이에 웃음이 터

졌다. 허가제라면 캐디나 동반자들에게 일일이 승낙을 받아야 다시 칠 수 있

을 터다. 한 사람이라도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비긴 어게인’ 하기 쉽지 않다.

 

신고제라면 다르다. 다시 치고 안 치고를 본인 뜻대로 결정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도전할 수 없는 기업인의 처지가 담긴,

요새 말로 ‘웃픈(웃기지만 슬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를 얘기하면서 포괄적 네거티브 규

제로의 전환을 약속한 날, 승차공유 서비스 ‘타다’는 검찰 손에 끌려 법정으

로 가는 신세가 됐다.

법이 금지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허용하자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 주장

은 2015년 3월 우버가 퇴출되면서 본격 주목받기 시작했다. 우버는 국내 진

출 2년 반 만에 이 땅을 떠났다.

 

운수업계 고발에도 버티던 우버는 2014년 12월 19일 서울시의회가 우버 영업

을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조례안을 통과시키자 백기를 들었다.

 

 

문 대통령 언급대로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은 국가적 차원에서 검토할 때

가 됐다. 4차산업혁명은 ‘법이 허락하고 있는 일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

제 하에서는 이뤄내기 어렵다.

 

과거의 법으로 미래를 재단해선 안된다. ‘차는 사람이 운전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자율주행차량이 거리에 나올 수 없고, ‘의료 데이터는 디지털 기기로

주고받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간단한 처방도 일일이 병원을 찾도록 해서는

신산업이 싹을 틔울 수 없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복잡다단하고 이해관계도 중층적인 미국·중국도 시행 중

인 네거티브 규제를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신사업은 신고만으로도 가

능하게 하는 대신,

 

징벌적 배상을 도입해 서비스나 신기술 출시 전에 꼼꼼히 준비하도록 하면

국내에서도 세계적인 ICT 기업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일자리 해법도

거기에 있다.

참, 아까 그 기업인들 골프모임에서 아무도 함부로 멀리건을 남발하지 않았

단다. 전체 경기 진행 속도, 골프 매너에 대한 타인의 평가 등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란다,

 

‘시장의 눈’에 맡기면 될 일을 공무원 손에 규제 권한으로 쥐여준 채, 우리

사회는 너무 버겁게 움직인다. 4차산업혁명이 눈앞에 와있는 이 시대에.

박태희 산업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