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달력
백 년 달력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2000년이 되고 난 후, 백 년 달력을 샀다. 홍대 앞 '아티누스'라는 예술 전문 서점
이었다. 달력은 커다란 포스터 형식이었는데 신문을 펼친 것보다도 컸다. 그 종이
한 장에 2001년부터 2100년까지 3만6500일이 빽빽이 인쇄되어 있는 걸 보니,
그중 어느 날 내가 사라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이 얼마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죽음이 분명 이 달력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메멘토 모리(네 죽음을 기억하라)'의 형상을 본 듯 시간이 날카롭고 선
명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달력 위에 형광펜으로 미래의 소망을 적었다. 소설가 지망생이었기 때
문에 등단이 첫째 꿈이었다. 이루어지길 원하는 날짜 위에 가지고 싶은 것, 살고 싶
은 집, 가보고 싶은 곳을 적기 시작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얼마 전, 상자에 고이 넣어둔 백 년 달력을 다시 펼쳐보았다. 안
타깝게도 형광펜으로 쓴 글씨가 세월에 날아가 있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 그
글자를 몇 번이고 헤아렸는데, 어떤 건 이루어졌고, 어떤 건 진행 중이고, 어떤 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건 대체 내가 왜 이런 걸 꿈꾸었을까 싶은 것도 많다는 점이었다. 지금
으로선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다. 꿈도 소망도 변하는 걸까. 돌이켜 보니 시간
이 바꾸지 못하는 게 없었다.
시간은 느리지만 끝내 꽃을 피우고, 나무를 키워 커다란 그늘을 만든다. 그러니 이
루어진 게 성공이고, 이루지 못한 것을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과정
에서 배움이 있었다면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 2020년의 달력을 보다가 셰릴 샌드
버그의 말을 보았다.
"사람들은 계획을 세울 때 삶을 오직 직선형으로, 단계별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꿈으로 가는 길은 사다리가 아니라 경력과 경험들이 엮인 정
글짐에 가깝죠. 그러니 계획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100년 달력 앞에 선다면 나는 무엇을 소망하고 계획해야 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27/20191227031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