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에 박근혜를 불러들인 자 누구인가
코로나 위기에 박근혜를 불러들인 자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0.03.09 00:33
이하경 주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악수 혐오증 때문에 2000년 대선 출마를 포기
했던 사람이다. 저서 『부자되는 법』에서 “세균에 대한 병적인 공포
(germphobe)가 있다”고 고백했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면 전문가 조언을 무시
하고 극단적인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다.
검사능력·시민의식 미국도 놀라
전문가 무시하다 방역 구멍 뚫려
미국 입국 금지하면 끔찍한 상황
정치는 방역 전선에서 퇴각해야
세계 2위의 감염국가 한국은 이미 103개국에서 입국이 금지되거나
절차가 강화돼 트럼프의 입국금지 결정은 언제든 내려질 수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유일한 동맹국이다.
그런 미국 땅을 오갈 수 없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코로나19 발원국
인 중국은 사과는커녕 “예방조치가 느려 걱정된다”고 한국을 조롱
한다.
한국은 이정도로 추락할 나라가 아니다. 35세 중국 여성은 1월 19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직후 폐렴 증상을 보여 검사를 받았다. 질병관
리본부는 다음 날 1호 확진자로 발표하고 감염병 위기경보 수준을
‘관리’에서 ‘주의’로 올렸다.
완치된 이 여성은 “(한국) 의료진은 영웅”이라는 감사 편지를 썼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을 ‘방역 모범국’이라고 했다. 한국은
하루 1만 명 이상씩 검사할 수 있는 의료 선진국이다.
천하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왜 한국처럼 못하나”라고
비난받을 정도다. 하지만 정부가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묵살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질본은 처음부터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눈치를 보다 후베이성만
입국금지 대상 지역으로 발표했다.
이미 우한에서 500만 명이 빠져나간 뒤였다. 그때 틀어막았더라면
확진자가 7000명을 넘고,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대통령”이라고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중국은 우리를 향해 “외교보
다 방역”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영세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없어 개점휴업 중인
곳이 많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줄 길이 없어 비싼 사채라도 끌어다
써야 할 판이다.
국내 금융그룹의 고위 인사는 내게 “정부가 예산 2조원을 신용보
증기금에 출연하면 보증 지원으로 시중은행이 10배인 20조원을
대출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에 11조7000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하면서
960억원만을 신보에 투입했다. 겨우 1조원 정도의 은행 대출이
가능한 액수다. 빈사상태의 자영업자들이 죽어나가 실물경제의
위기가 금융위기로 불붙어도 좋다는 것인가.
반면에 저소득층 소비쿠폰을 나눠주는 데는 2조원을 배정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독려하면서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문가와 상인들의 의견을 들어는 본 것인가.
대만은 선제적 대응으로 코로나19 피해를 최소화했다. 확진자가
나오기도 전에 중앙전염병지휘센터를 만들고 치과의사 출신 천스
중 위생복리부장(장관)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철통같이 틀어막고, 감염의심자 자가격리
에 들어갔다. 야당에서 “인도주의 원칙에 반한다”고 하자 행정원장
(총리)은 “자신을 구해야 남도 구한다”고 맞섰다.
일찌감치 의료용 마스크 수출을 금지했고, 한국이 따라서 하고 있는
‘건강보험 카드를 이용한 마스크 구매 실명제’로 사재기를 차단했다.
천스중은 국민영웅이 됐고, 차이잉원 총통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2003년 사스가 발생했을 때 노무현 정부는 과감한 방역조치로 선
방했다. 감염자 3명, 사망자 0명으로 끝냈다. “인권침해”라는 반발
이 나오자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게 최고의 인권”이라고 맞섰다.
지금 대만의 대처는 어쩐지 노무현 스타일과 흡사하다.
요즘 집권세력은 신천지를 두들겨패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이해찬·
박원순·이재명·추미애가 앞장섰다. 방역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천지가 은밀한 조직 특성이 있어 확산의 기폭제 노릇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인 질본의 “압박을 가하면 숨어버
린다”는 의견을 따라야 한다.
코로나가 “마귀의 짓”이라는 신천지 총회장은 ‘박근혜 시계’를 차
고 나타나 두 번 큰절을 했다. 이틀 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옥중메
시지를 발표했다.
코로나 사태에 “가슴이 아프다”면서 “기존 거대야당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달라”고 했다. 총선을 앞둔 황교안은 “천금같은 말씀”
이라고 반색했다.
이 판에 누가 박근혜까지 불러들였는가. 과학으로 대처해야 할 방
역 전선에서 먼저 정치 쇼를 벌인 집권세력이 책임져야 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GDP가 2017년 기준치부터 4만1001달러로 일본(4만827달러)을
앞섰다.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뛰어난 의료전문가, 탁월한 시민의식도 있다. 대구를 취재한 미국
ABC방송 기자는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고요함만 있다”고 경의를 표시했다.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전문가 중심의 컨트롤 타워를
세우면 방역 선진국이 되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정치는 국민의
생명, 국가의 생존이 걸린 방역전선에서 즉시 퇴각해야 한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