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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나는 "1도 없다"에 분개한다
조 쿠먼
2020. 7. 28. 07:29
조선일보 원선우 정치부 기자 2020.07.28 03:12
"그럴 가능성은 일(1)도 없습니다." 지난 23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윤건영(초선·서울 구로을) 의원이 이 장관 아들의
스위스 학교 '특혜 입학' 의혹을 부인하며 이같이 말했다.
윤 의원은 이날 "1도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는 "(이 후보자가) 개입
할 여지가 단 1도 없고" "부친이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
은 단 1도 없다"
"대북 전단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에 단 1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윤 의원의 발언은 국회 회의록에 빠짐없이 기록됐다. '1도 없다'는 20
14년 우리말에 서투른 캐나다 국적의 한 가수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1도 몰으겠다"고 쓴 데서 유래한 신조어다.
이후 한 걸그룹이 '1도 없어'라는 노래를 부른 뒤 대유행했다. 그러나 맞춤법
상으로는 '하나도'를 '1도'로 바꿔 쓸 수 없다는 것이 국립국어원 공식 입장이다.
국립국어원은 "'하나'는 뒤에 오는 '없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호응하여
'전혀' '조금도'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라며 "이는 숫자 1을 '하나' 또는 '일'
로 읽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므로 대체하긴 어렵다"고 했다.
국어사전도 명사(名詞) '하나'와 수사(數詞) '일(1)'을 엄연히 구별하고 있다.
학계에선 '1도 없다' 대유행 뒤 우리말의 기수(基數)와 서수(序數) 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의원의 '1도 없다' 발언이 마음에 걸린 또 다른 이유는 최근 인터넷을 뜨
겁게 달군 '사흘 논쟁'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 언론은 8월 15~17일 '사흘 연휴'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적잖은 사람이 "3일을 왜 사흘이라고 쓰느냐" "사흘은 4일이다" "수
준 낮은 기자들이 한국어도 모른다"고 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사흘'이
오르는 진풍경마저 벌어졌다.
윤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냈다.
국정기획상황실은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긴급 사안을 실시간으로 대통령
에게 신속, 정확하게 보고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1보'가 잘못되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최대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편견·선입견에 따른 섣부른 분석이나
전망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런 윤 의원의 "1도 없다" 발언은 실망스러웠다.
윤 의원은 그날 청문회에서 '운동권 선배' 이인영 장관의 과거 주체사상 추
종 전력이 논란이 되자 "천박한 사상 검증"이라며 "수많은 청년의 피와 땀
으로 이룬 민주주의는 함부로 폄하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 시절 학생운동가들의 고귀한 뜻은 잘 알겠다. 이젠 모국어의 품격(品格)도
지켜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