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쿠먼
2020. 8. 3. 07:08
[만물상] 조용한 연설의 힘
조선일보 강경희 논설위원 2020.08.03 03:20
얼마 전 미국 의회에서 한 여성 의원이 즉석 발언을 한 것이 '시대에 남을
연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스물아홉에 미 연방의회 사상 최연소 여성 의원이 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
오코르테스는
의사당 계단에서 남성 의원으로부터 폭언과 욕설을 듣고는 의회 발언대에
나와 "딸이 있다고 해서, 아내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남성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딸과 아내가 있는 내가 그런 말을 했겠느냐"는
부인을 반박한 것이다.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한 편의 명연설 덕분에 일약 대통령
감으로 떠올랐다. 2004년 7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담대한 희망'이
라는 제목의 연설로 당내 대선 후보 존 케리보다도 더 주목을 받았다.
이 연설에서 오바마는 "만약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제 아이는 아니지만 그것은 저의 문제입니다. 저는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라고 했다.
구약 성경에서 동생 아벨을 질투해 죽인 가인이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
까"라고 했는데, 오바마는 이 구절을 뒤집어 표현하면서 리더로서의 책임과
포용을 강조해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상의 정치에서 신뢰할 만한 연설은 국민을 설득하는 큰 힘을 지닌다.
지난 3월 코로나 와중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동서독 통일 이래,
아니 제2차 세계대전 이래의 시련"이라고 코로나의 위험성을 솔직히 밝
히고 국민들의 협조를 구한 차분한 연설로 지지율이 11%포인트나
치솟았다.
▶거대 여당이 임대차 3법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와중에 야당
윤희숙 의원이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한 것이
화제다. 경제학자답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해
일약 주목받았다.
여당 의원과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리적 반론은 못 하고 온갖 변죽
울리는 비난만 쏟아내는 걸 보면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명연설은
분명한 듯하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국내에도 연설 잘하는 정치인이 적지 않
았다. 대부분 지지자들의 피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변 쪽에 능
했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서도 광장의 사자후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제 국민은 하루하루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조용하지만 명징
한 논리로 설파하는 정치인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 176석 거대 여당의
폭주를 막을 방법이 없어 무력감을 느끼는 야당 의원들에게도 윤 의원의
국회 연설이 깨우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