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쿠먼
2020. 11. 10. 07:54
외교는 아무나 하나
[중앙일보] 입력 2020.11.10 00:30
남정호 문화일보 논설위원
지난달 26일 국회에서는 한국 외교의 무력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 대선 8일 전에 열린 외교부 국정감사장. 질의에 나선 박진 국민의힘 의원은 바
이든 시대를 염두에 둔 외교부의 준비 태세를 따졌다.
“공개·비공개로 준비 중”이란 대답이 나오자 박 의원은 바이든 캠프의 외교·안보 핵
심 참모인 토니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과 미셸 플러노이 전 국방부 차관을 거명했다.
둘 다 국무·국방부 장관과 백악관 안보보좌관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 외교부에서
매긴 바이든 캠프 내 중요도 순위에서 1, 3위를 차지한 핵심 중 핵심이다.
바이든 취임 앞두고 소통 부재 심각
외교 수뇌부, 핵심 참모도 못 만나
야당 측 도움 받는 게 현실적 대안
박 의원은 강경화 장관, 최종건·이태호 1·2차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김
준형 국립외교원장 등 외교부 수뇌부를 차례로 호명하며 “이들을 만난 적이 있느냐”
고 물었다. 그랬더니 죄다 “없다”는 거였다.
박 의원은 “이런 인사도 안 만나면서 무슨 대미 정책 준비냐”고 호통쳤다. 이에 외교
부 측은 “외국의 선거 개입 우려로 바이든 캠프에선 해외 인사와의 접촉을 막고 있다”
고 설명했다. 틀린 해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접해 본 당국자가 외교부 수뇌부에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못해 공포스럽다. 둘 다 자주 한국을 드나들던 지한파 인사인 까닭이다. 블링컨은
국무부 부장관으로 취임한 2015년 1월 이후 2년 동안에만 네 번 한국에 왔다.
“김치를 좋아한다”는 플러노이도 2016~2017년 미 안보 전문가들을 이끌고 방한해
외교부를 찾았으며 이전에도 “두 번 온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 외교가에도
낯익은, 한·미 관계에 깊숙이 관여해 온 인물이란 얘기다.
이 같은 인사들을 외교부 수뇌부가 만난 적이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외교부와 바
이든 외교라인 간에 소통이 잘될 리 없다. 이런 ‘웃픈’ 상황은 문재인 정권의 작품이다.
한반도 문제에 천착해 온 이들과 교분을 쌓아 온 한국 외교관은 당연히 적잖았다.
문제는 현 정부에서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을 잘 아는 북미·북핵통 외교관들을 죄다
적폐로 몰아 내쫓거나 한직으로 내쳤다는 거다. 그러면서 현 정권은 주요 포스트에
전문성과 거리가 먼 친문 인사들을 앉혔다. 지난 9월 현재 문 정부 출범 이래 임명된
42명의 특임 공관장 중 67%인 28명이 이런 케이스라고 한다.
과거에도 보수·진보 간 정권이 바뀔 때면 장차관은 으레 교체됐다. 하지만 유능한 고
위 외교관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한꺼번에 내쫓진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정권 때의 홍순영 차관을 장관으로 썼다. 이명박 정권의 초대 외교 수장인 유명환
장관도 노무현 대통령 때 차관을 지냈다.
더 기막힌 건 한·중·일 3국 중 바이든 정권과의 불통을 걱정하는 건 우리뿐이라는
점이다. 지난달 초 일본의 시사잡지 프레지던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오바마 정권 때 관방장관이어서 난항을 겪던 미군기지 문제 등을
논의하며 미국 측과 신뢰를 쌓았다”며 “바이든이 당선될 경우 참모진은 오바마
시대의 멤버로 채워질 전망으로 (스가 총리가) 이들의 사고방식과 버릇까지 꿰
뚫고 있어 참으로 든든하다”고. 중국 역시 시진핑 주석 자신이 바이든을 잘 안다.
그가 부주석이던 2009년 1월, 바이든이 파트너 격인 부통령으로 취임한 덕이다.
이후 시진핑이 2013년 주석에 오르기까지 두 사람은 4년간 단독 만찬만 여덟 번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이들을 보좌한 미·일, 미·중 담당자들도 서로 잘 알 수
밖에 없다.
문 정부는 이제 정통 외교관을 홀대한 업보를 치르게 됐다. 이인삼각으로 대북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할 바이든 측 핵심 외교라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채널이 사
라진 것이다. 더 큰 비극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궁여지책으로 바이든 진영과 친숙한 야당 측 인사들의 도움을 받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일 수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