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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살이 [횡설수설/이진영]

조 쿠먼 2020. 11. 19. 07:20

호텔살이 [횡설수설/이진영]

 

최영미 시인은 3년 전 갑질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월세 만기가 돌아와

이사할 곳을 찾던 그는 서울 유명 호텔에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주

면 평생 홍보대사가 되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스스로 페이스북에 공

개했다.

 

한 언론이 이를 “시인 최영미, 유명 호텔에 룸 사용 요청 논란”이라고 보도

하자 온라인은 “유명세를 이용한 갑질”이라며 들끓었다. 유명 예술가 중에

는 최 시인이 ‘로망’이라 표현했던 도심 호텔 생활자가 여럿 있다.

 

미국 시인 겸 비평가 도러시 파커는 뉴욕 맨해튼의 앨곤퀸 호텔에 살면서 당

대 문장가들과 교류했다. 그가 살던 방은 ‘도러시 파커룸’으로 꾸며져 마케팅

에 활용되고 있다. 첼시 호텔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을 비롯해 20세기 이단아들이 숙박비 대신 작

품을 내밀며 무명 시절을 보냈다. 예술가들이 도심 호텔을 찾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전세 난민도 호텔살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정부가 19일 발표하는 전세

대책에는 호텔방을 임대주택으로 리모델링해 공급하는 방안도 있다. 서울시가

올 초 종로구 베니키아 호텔을 ‘역세권 청년주택’으로 개조해 238채를 공급했

는데 호텔을 임대주택으로 전환한 첫 사례다.

 

코로나19로 서울 호텔 객실 점유율이 30%대로 내려앉고, 서민들은 전월세를

못 구해 발을 구르니 일석이조의 묘책일까.

 

▷따져 보면 그렇지가 않다. 호텔방 개조로는 원룸밖에 안 되는 데다 공급 물량

도 수백 채여서 전세대책이라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리모델링 비용을 감안

하면 시세보다 싸게 내놓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베니키아 호텔 개조 주택도 현재는 공실이 없지만 올 4월 계약 마감 당시엔 추가

옵션비 부담으로 월세가 70만 원까지 나오자 180여 가구가 입주를 포기했었다.

오죽하면 그런 대책까지 내놓겠느냐며 정부도 단기 10만 채 공급을 위해 ‘영끌’

(영혼까지 끌어 모으기)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요즘은 집을 호텔처럼 이용하는 에어비앤비족(族)과 호텔을 단기로 빌려 집

처럼 사는 노마드족들로 공간 혁신이 일어나는 시대다. 호텔살이는 ‘선택’일

때나 낭만이지 그것밖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에선 남루한 일상일 뿐이다.

 

최 시인의 갑질 논란은 그가 저소득층 근로 장려금 지급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난한 시인이 호텔에 갑인 적이 있던가’라는 반론이 힘을 얻고,

집주인이 “1년 더 살라”고 배려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호텔방 전월세라도 알아봐야 하는 전세 난민들에겐 수요만큼 집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