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침마다 면세점 줄서는 100명의 정체는…
조 쿠먼
2021. 1. 29. 07:18
아침마다 면세점 줄서는 100명의 정체는…
中보따리상, 코로나로 한국 오가기 힘들자 ‘구매대행팀’ 만들어 쇼핑
이영관 조선일보 기자 입력 2021.01.29 03:00
26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 100여 명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두툼한 패딩이나 점퍼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의
이들 중 상당수는 번호표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한 남성은 “전날 3000달러 이상 면세품을 산 사람에게 나눠주는 VIP표”
라고 했다. 이게 있으면 줄 서지 않아도 개장 시간에 맞춰 우선 입장할
수 있다. 개점 시각인 9시 30분이 되자, 휴대용 체온계를 든 직원이 손목
의 열 체크를 한 뒤 10명씩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더니 익숙한 듯 10층 버튼을 눌렀다. 샤넬·
에르메스·루이비통 등 명품을 파는 면세 매장이다. 면세점 관계자는 “줄
서 있는 사람 대부분 중국인이거나 중국 교포”라고 귀띔했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면세점 본점 입구에서 개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수십m에 이르고 있다. 면세점 관계자는 “대부분 중국인이거나 중국 교포”라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면세점을 찾는 내·외국인 관광객 발길이 뚝 끊어진 가운데 중국인 보따리상 ‘다이궁(代工)’들이 면세점 업계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평가다. /오종찬 기자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1년 가까이 가로막혔지만 여전히 면세점을 휩쓸
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다이궁(代工)’으로 불리는 중국인 구매 대행
보따리상이다.
이들이 면세점 업계의 ‘큰손’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중국 출
입국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들은 진화(進化)하며 끝까지 살아남았
다. 한 대기업 면세점 관계자는 “코로나로 면세점이 죽을 판인데 사실상
다이궁 수백 명이 우릴 먹여 살리는 셈”이라고 했다.
다이궁들은 ‘2인 1조’가 기본이다. 중국으로부터 구매 물품 주문을 받는
한국인이나 교포 중개상과 면세점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직접 구매를 담
당하는 중국인이 한 조를 이룬다.
출국을 앞둔 중국 유학생, 식당 등에서 일하다 돌아가는 이들이 주로 구매
를 담당하는 ‘대리구매 알바’를 한다. 보따리상들이 직접 중국과 한국을
오가기 어려워진 탓이다.
하루 일당은 13만~15만원 정도. 중국인 유학생 기강(26)씨는 “중국으로
귀국하면 2주 호텔 격리에 1주는 집에서 자가 격리를 한다”며 “100만~150
만원 정도 하는 호텔 격리비를 벌려고 22일부터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다이궁들의 숫자는 줄었지만, 씀씀이는 더 커졌다. 중국 교포 박모(45)씨는
이날 오전 9시 30분, 중국인 유학생 장모(24)씨를 롯데면세점 엘리베이터
앞에서 접선해 명품 B브랜드 매장으로 달음질쳤다.
그는 매장 직원에게 스마트폰으로 시계·팔찌·목걸이 사진을 차례로 보여주
고, “지금 재고가 있다”고 하면 곧바로 어깨에 둘러멘 가방에서 띠지로 묶은
5만원 현금과 상품권 다발을 꺼내 착착 결제했다. 기자가 동행한 1시간 새
그는 “3000만원어치 현금과 상품권을 다 썼다”고 했다.
인근 사무실 직원에게 전화하자, 10분도 안 돼 직원이 상품권 2000만원어
치를 들고 나타났다. 박씨는 이날 하루 롯데·신세계 등 시내 면세점에서만
7000만원어치 명품을 샀다.
다이궁의 면면도 달라지고 있다. 코로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국내 여행사
직원들이 살길을 찾아 대거 다이궁 중개상으로 변신했다. 중국인 관광객 가
이드로 7년 동안 일하다가 작년 6월부터 다이궁 중개상이 된 박씨는 “이젠
여행도 뚝 끊기고, 다이궁 하면서 그래도 월 200만원쯤 벌어 생계를 유지하
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 확산기인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국내 면세점의 내·외국인 매출액
은 각각 4200억원, 10조7700억원이었다. 롯데면세점 관계자는 “다이궁
의존이 더 커지면서, 중국인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19년 82
%에서 작년엔 93%로 늘었다”고 했다.
코로나 속에서도 다이궁은 한국 면세품을 가장 선호한다. 다이궁 중개상인
박씨는 “한국 면세품은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진품을 찾는 중국인 수요
에 적합하다”고 했다. 실제 다이궁 중개상들은 면세품을 산 뒤 ‘진품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매장에서 구매한 면세품과 영수증을 함께 사진으로 찍고, 상품 설명을 간단
히 담은 동영상을 중국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한국 정부가 ‘면세품
규제’를 완화한 것도 다이궁들에겐 호재다. 과거 면세품은 출국 당일 공항
에서 찾아 들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달 1일부터는 면세점에서 구매할 때 해외 주소를 건네주면, 구매자
가 한국에 체류해 있어도 해외로 상품을 배송해주는 제도를 시행했다. 중개상
김모(28)씨는 “이 제도가 시행된 후 물건을 더 빨리 배송할 수 있게 됐다”며
“한국 면세점이 더 매력적인 구매처가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