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경제포커스] ‘소주성 설계자’의 염치

조 쿠먼 2021. 4. 21. 06:26

[경제포커스] ‘소주성 설계자’의 염치

‘세금 주도 성장’으로 변질돼 간판 내린 ‘소주성’ 주역이

‘한강의 기적’ 산실 KDI 원장?

염치없는 행보, 스스로 접길

김홍수 조선일보 논설위원 2021.04.15 03:00

2년 전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인터뷰했다. 내내 “성과는 부진

하지만 방향은 옳다”고 했다. 후회되는 점이 없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답을 내놨다. “2018년 25조원 넘게 재정 흑자가 났는데, 그걸 몰라

추경 규모를 더 키우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예산 당국 기재부에 속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재정 건전성’을 중시

한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쫓겨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 보수 정부의 경제정책을 ‘부채 주도 성장’이라고 폄하했다.

근로자, 자영업자의 소득을 높여 ‘소비 촉진→투자 확대→경제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소득 주도 성장(소주성) 전략을 내세웠다. 소

주성 설계자가 홍 수석이다. 소주성 이론에 의거해 최저임금 인상, 비정

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추진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연간 취업자 증가 폭이 5000명대로 추락하고, 저소득층 소득은 더 떨어

지고, 집값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홍 수석은 경질되고,

소주성 간판도 슬그머니 가려졌다.

문 대통령은 경제 멘토 홍 수석에게 미안했던지 소주성 특위를 만들어

위원장 자리를 줬다. 패자 부활전을 기대하는 듯 홍 위원장은 무급 보직

인데도 열심히 활동했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세금 주도 가짜 성장’이라고 비판하는 와중에 소

주성 3년 평가 세미나를 열어 “소주성 정책 덕에 성장률 급락을 막고

소득 분배가 개선됐다”고 반박했다.

저성장, 고용부진이 계속돼 변명거리가 궁해질 참에 코로나가 찾아왔다.

홍 수석은 “코로나가 고용 안전망을 강조해온 소주성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소주성은 5년, 10년 추진해야 할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한다는 ‘인디언 기우제’가

떠오른다.

그의 외골수 행태는 스승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를 닮은 구석이 있다. 변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수출 주도 성장 전략에 반대로 일관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선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고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내나.

소수 부자들이 처첩들을 태우고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될 것”이라고 비

판했다. 수출 주도 대신 수입 대체 성장 전략를 주장하고 포항제철, 중화

학 공단 조성에도 반대했다. 변 교수가 키운 ‘학현학파’는 진보 정부에서

중용됐다.

인맥 명단에 홍 수석 외에 이정우(노무현 정부)·김상조(문재인 정부) 전

청와대 정책실장, 강신욱 전 통계청장 등이 들어 있다. 이런 경력과 뿌리

를 가진 홍 수석이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

후보로 거명되고 있다.

KDI가 어떤 곳인가. 박정희 대통령의 ‘번영을 향한 경제 설계’ 주문에 따

라, 수출 공업화 중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짰던 곳 아닌가. 원로 경제

학자들이 “KDI 해체,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

고 반발할 만하다.

홍 수석이 자기 철학에도 부합하지 않고 스승이 늘 대척점에 섰던 국책연

구소의 수장 자리를 탐내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KDI를 소주성 패자

부활전 무대로 삼을 요량이라면 더더욱 안 된다. 온갖 불협화음으로 연구

역량만 훼손할 것이다. 스스로 접는 게 옳은 처신 아닐까.

문 대통령이 중용한 인사들은 과오나 실패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부동산 정책 설계자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 탈원전을

밀어붙인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등은 입이 없는 듯 살고 있고, 정책 사령탑

장하성·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정책 실패를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우기다 궁지에 몰리면 ‘적폐 탓’으로 돌린다. 이런

아집, 오만에 질린 국민이 4·7 선거에서 분노를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