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3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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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지식 재산권
장택동 논설위원 동아일보 2021-04-30 03:03
에이즈(AIDS) 치료제는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정작 상황이 심각했던
아프리카 국가에선 이용하기 어려웠다. 환자 1명당 연 1만 달러가 넘는
약값은 빈국 주민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쌌다.
특허권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는 비난이 커지자 세계무역기구(WTO)
는 2001년 보건 비상상황에서 예외적으로 특허권을 일시 면제할 수 있
다는 내용의 도하선언을 채택했다.
이 합의 이후 치료제 생산이 크게 늘면서 약값이 뚝 떨어졌다. 20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 백신을 놓고 비슷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면제를 검토 중이라고 27
일 밝혔다.
지난해 10월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WTO에 이를 제안했지만 그
동안 선진국들이 찬성하지 않아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또 미국 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2000만 회분을 인도에 공급하고, 캐나다 멕시코
에 총 400만 회분을 지원하기로 했다.
국방물자생산법까지 발동해 백신의 해외 유출을 막던 미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 러시아의 파상적인 백신 외교가 영향을 미
쳤다. 중국은 약 90개국에 자국산 백신을 수출하거나 지원했고 국경 분
쟁을 벌이고 있는 인도에도 백신 지원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도 약 70개국에 러시아산 백신을 공급했다. “중국 러시아와의 백신
외교 전쟁에서 서방국들이 졌다”(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세계 최강국 미국은 체면을 구기게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8일 “미국이 다른 나라들을 위한 백신의 무기
고가 되겠다”며 전의(戰意)를 다졌다. 미국으로선 백신 외교의 실패가 중
국과의 패권 경쟁에 악재가 될 수 있어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16%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급받은 백신은 전 세계 생산량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전 세계 인구의 16%인 부국들은 백신의 53%를 가져갔다.
이런 상황인데도 미국이 계속 백신을 움켜쥐고 있다가는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맞게 될 공산이 크다. 선진국들의 백신 자국 우선주의에 대
해 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자국민을 먼저 챙기는
것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국민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정부의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더라도 언제든 다른 팬데믹이 닥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외교적 해법, 지재권 면제 등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건, 안보 등 국가·국민의 존망과 직결되는 분야일수록 자강(自强)의
토대 위에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