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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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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 컬럼'에 해당되는 글 49

  1. 2009.10.29 만 원의 기억
  2. 2009.10.08 북한 동포들과의 만남
  3. 2009.10.06 귀신과의 대화
  4. 2008.12.21 47 년만의 변고
2009. 10. 29. 13:19 一石 컬럼

만 원의 기억

그 하나

아침 출근 길 동부 간선 도로 장안동을 지나 중랑천을 건너가면서

늘 김밥과 물 한병을 이천 원에 파는 젊은이가 지난 겨울 추위에도

열심히 아침 장사를 하는 걸 약 한 달간 지나며 보아 오다가 한 번은

꼭 그 젊은이 한테 조그마한 도움을 주겠다고 별르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곳이 시속 80 킬로 도로여서 여간 잽싸지 않으면 젊은이

도우려다 뒷 차에게서 혼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싶어서 조심스러웠다.

어느 날 아침 7 시 20 분경 다행히도 그 곳이 밀리는 바람에 서행을

하고 있었고, 그 날도 여전히 그 젊은이의 “김밥”이라는 패말을 200

여 미터 전방에서 보였기에 운전석 창문을 활짝 열고 왼 손에 만 원

짜리 한 장을 흔들어 대었다.

아니나 다를 가 그 젊은이는 부리나케 물 한 병과 김밥 한 줄을 들고

뛰어 왔다. 나는 얼핏 “물만” 하고는 만원을 건네며, “거스름은

그냥 갖어”라고 말하고는 부지런히 앞차를 쫓아간 일이 있은 후로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젊은이의 부지런함을 속으로 칭찬해 왔는데

어떤 때에 그 친구가 연 이틀을 보이지 않아 걱정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둘

오랜만에 시청 앞에서 저녁을 하려고 전철을 타고 가는 중 청량리 역에서

어느 꼬부랑 할머니가 주렁주렁 장을 봐 가지고 타셨으나 빈자리를 찾을

낌새도 없이 주섬 주섬 바닥에 정리하는 걸 보고 나는 일어나서, “할머니

이리 앉아 가세요“ 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꼬부랑 할머니 옆에는 형편이 훨씬 나아 보이는 할머니가 있었고, 두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 나이에 지식들 부려먹지 아니하고 고생을 하셔 ?”

꼬부랑 할머니 왈, “자석 덜, 아무 짝에도 못쓰고, 내가 꿈적이는 게 제일

편혀” “이거 다 경동 시장에서 샀고 동네에 가져가서 팔면 나 혼자 밥

먹을 수 있어” 하면서 고쟁이 주머니에서 꼬깃한 천원 짜리 두 닢을

보이며 “장 보고도 아직 돈이 남어 있어” 하신다.

내게는 기막힌 현장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뒤돌아서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조그마하게 접어가지고, 꼬부랑 할머니 손을 펴 쥐며 남들

모르게 넘기고 그 손을 꼬옥 접어드렸다.

그 할머니 그냥 손의 감촉으로 지전임을 알었으니 조용하였으면 좋았겠는데

그걸 펴서 만 원임을 보더니 큰 소리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니 옆에 있던

할머니랑 다른 나이 많은 승객들이 박수까지 친다.

TV 속의 박수 문화가 전철에 까지 옮겨졌다니 모르는 이로부터 박수를 받기는

어려서 웅변대회 끼어서 가 처음이었고 실제 상항에서는 문화의 충격이었다.

기왕 벌어진 일, 나는 “할머니 오늘 저녁은 좀 좋은 것 사드세요”하였고

마침 전철이 어느 역에 정거를 하게 되어 나는 우선 그 현장을 피하고파서

부지런히 내리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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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9. 10. 8. 12:57 一石 컬럼
북한 동포들과의 만남 (1)

리비아의 동쪽 거의 끝쪽에 “데르나” 라는 조그만 도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협력회사”가 위치 하여있었고
약 삼천명의 근로자가 G to G 계약으로 나와 일하고 있었읍니다.

데르나에는 우리 건설 현장이 있었기에 자연히 우리 사람들과
교우하는 일이 가끔씩 있었습니다.

리비아는 땅의 넓이가 우리 대한 반도의 9.7 배가 되고, 지중해 연안
부근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후를 누리고 살고 있으나, 내륙으로
들어가면 사막이고 더 들어가면 검은 피부의 사람들입니다.

워낙 넓은 땅의 나라이기에 이. 삼백 키로미터 간격으로 휴게소 같은 곳이
있고, 그 곳을 지나치게 되면 안전운전 하는 것도 그렇고 너무 지루한
운행이 되기에 거의 모든 통과객 들은 휴게소에서 맹물이나 “홍차” 또는
우리가 지은 말로 “걸레 빵”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남.북한 동포끼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대게는 우리들이 홍차나 맹물을 대접하는 게 상례이고, 서로가 한국사람
들 끼리이니까 리비아인 들도 그냥 그렇게 보아 줍니다.

우리 근로자들이 대게는 먼저 말을 걸게 되는데, 거의 첫 번째 질문이

“야, 너 이 달에 얼마나 “싸인” 했냐 “ 입니다. 그들은 못 알아듣고 되 묻습니다.

“싸인이 뭐이가 ?”, “얌마, 너 이 달에 송금 얼마나 했냐고 ?” “느이 마누라 하고
새끼들 먹여 살려야 하쟎어 ?

그들은 다시 못 알아 듣습니다. “송금이 뭐이가 ?” “무슨 송금이라는 게 있네?”

그들은 현지에서도 수당이 없다는 게 솔직한 답이었고, 대신 “우리는 조국이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얼굴 색은 솔직합니다.

이러한 실정이 얼마 후에 바뀌게 되었는데,

얼마가 지나서 만났을 때 그들은 묻지 않은 답을 먼저 하였습니다.
“야, 우리도 이번부터는 느네 나라 돈으로 백만원 송금 했어, 야…”

밖으로 나와서 일하는 시간이 있는 그들에게는 교육이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2002년 05월 17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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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9. 10. 6. 08:54 一石 컬럼
귀신과의 대화

2001 년 4 월 어느 주말에 벗 천사령이 산청에 가서 천도제를 올릴 일이
있다고 동행하자 하여 산청군 생초면에 있는 절에 다녀온 일이 있다.

왕년에 벗이 산청 서장을 할 때에 어느 면의 파출소장을 하던 분을 위한
천도제로, 그 어른이 나이도 많이 들어 정년이 가깝도록 일한 분이었는데,

젊어서 바람을 많이 피운 탓에 애들도 큰 집 작은 집에 여럿이 있었으나
수신제가가 잘 못되어서 아무도 그의 노후를 돌보아 주는 아해가 없어서
아주 어렵게 그리고 초라하게 생을 마감하였다는데,

그의 공직 생활만은 본 받을 일을 많이 하였던 고로 벗은 그의 사후 천도를
사비로 모셨던 것으로 숨겨진 고운 일이어서 기억을 되 살리고자 한다.

천도제에 참석 하신 분 중에 일정 때 진주사범 3회 졸업 하신 분으로 초등학교
교장 선생 님도 정년까지 하신 분이신데, 이 어른이 “귀신”과 대화를 나누
시는 분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추앙 받고 있는 분이다.

천도제를 다 지내고 공양을 하면서 벗이 교장 선생 님에게 물었다.

“교장 선생 님, 천도제 받은 사람 만나 봤어요 ?” 하니, 만나서 대화까지
나누었단다.

“그 친구가 자기 천도제를 지내 준다니까, 남루한 차림으로 고개 숙이고
부끄러워 하며 들어오자마자 정신 없이 제에 놓인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길래 그대로 두었단다”

실컷 먹고 나서 제가 끝나니까 교장 선생님에게 “천 서장 님에게 너무 고맙다고
전하여 달라면서” 말로 인사 치례를 하고 구천을 떠난다며 급히 절을 떠나더란다.

나이 팔순 되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그의 표정을 읽으며 들었는데, 티 하나
없는 사실을 그대로 전갈하는 순수한 표현으로 읽혀졌는데 이 글을 읽는 이의
이해도는 내가 헤아릴 수가 없을 뿐이다.

지난 팔월 초에 함양 백전면에서 여러가족이 하루를 보낼 때 “지리산 산신령이
여자에서 남자로 최근에 바뀌었다는” 벗의 말이 바로 그 교장 선생 님으로 부터
들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2002년 09월 01일 1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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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8. 12. 21. 13:53 一石 컬럼

47 년만의 변고

지난 19 모교 100 주년 기념관에서 송년회에 은사 분을 모시고

졸업 47 주년 행사를 가지면서 괴변이 여럿이 일어 났기에 모아본다.

괴변의 발단은 80 객의 은사 님들께서 머리 염색을 젊은이 같이 하신

탓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해들은 색칠하지 않은 모발이었기에 머리가 흑발이 입장을 하면 모두가

동기 동창으로 오인하여 막말로 인사를 건네면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하기는 아해들이 이미 지난 91년도 졸업 30 주년 행사에서부터 생겨났으니까

그리 고는 아니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17 년전 행사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운제 박사께서 조금 일찍이

오셔서 입장하는 아해들을 성을 빼고 불러 주시는데 인사 받는 아해 입장에서

얼핏 보기에 흑발의 친구로 오인하여,

, 짜샤, 오랫만이다 (!)” 하는 외침에 스승께서는 흐뭇(?)하셨을 지도 모르겠으나

본심은 고약한 제자로 학교 같으면 그림자도 밟던 아해들이 하면서

찍혔을 터이다.

그런데 다음 아해가 가까이 와서 자세히 보니 이름을 불러 사람이

또래로 보였지만 또래 치고는 얼굴의 주름이 심상치 않아보이기에, 아해는

이름도 모른체 계속 2 감탄사를 발휘 한다는 것이,

, 짜샤, 근데 이리 폭삭 늙었냐 ?”

스승께서는 그냥 미소로 일관 하시었고 아해는 안으로 들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회의가 시작 되어서 아까 폭삭 늙은 친구를 찾아 두리번

하여 보니, , 이런 냥반이 은사 테이블에 계시지 않는가 (!)

아해는 둘바를 몰라 하다가 30 주년 행사가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 입구에

제일 먼저 기다리다가, “아이구 선생 , 죽을 죄를 저질렀읍니다 (!),

하였읍니다. 여러번 조아려 말씀 올리고 받은 이후 년이

흘러서는 여러 아해들이 불경에 가까운 조둥이를 놀려 대었다.

제일 먼저 도착하신 국문학 평론의 원로이신 김우종 선생님을 내가 모시고

입장하여 회장이라는 아해가 미소지으며 악수를 청하며 말이,

, 이름이 뭐였지 ?” 머리 염색으로 청년다우시고 주름도 거의 없으시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나침에는 틀림이 없다.

옆에 있던 다른 친구는 조금 낳은 처럼 악수를 청하며 스승 님께서 이름을

밝히자 , “, 00

선생님이 답하시기 전에 내가 선생 님임을 가르쳐 주니 황당스러운 아해로

돌변하여 읖조릴 밖에 없었다.

다른 변고가 있었다.

인하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 친구가 송년회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서 소피를

보고 있는데, 어느 젊잔은 친구(?) 고급스러운 모자를 쓰고 자리에서 소피를

보는 것을 옆으로 흘끔 쳐다보니 얼굴이 童顔 처럼 맑고 주름 하나 없었겠다.

아해가 그만 한다는 소리가,

, 곱게 늙었다 (!)”

, 이한수 선생이야 (!)”

세상에 오줌 누다가 손으로 쥐고 절하는 아해는 스승 님이나 아해나 처음

있는 불상사였으리라.

다른 변고가 있었겠으나 아직 수집이 덜된 상태이니 밝혀 같다.

여러가지 변한 모습의 친구들을 잠시 소개한다면, 지팽이 하나 짚는 것은 자연

스럽게 보이지만, 지팽이 쥐고 친구, 지팽이는 분명 하니인데 지팽이

발굽이 사각형으로 네개를 가지고 다니는 친구 다들 즐거운 모임의 송년회

였음에는 토를 이유가 없는 즐거운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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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柱 八字 · 九 ’  (0) 2008.03.18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