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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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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15. 06:55 카테고리 없음

할머니와 손녀

 

 

“누가 물에 빠뜨린 닭 달랬어?” 영화 ‘집으로’(2002년)에서 일곱 살 상우는

프라이드치킨 대신 닭백숙을 내놓은 할머니에게 떼를 쓴다. 난생처음 산골에

사는 외할머니 집을 찾아온 상우는 걸핏하면 괴롭히고 투정을 부리지만,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할머니는 무조건적 애정으로 손자를 묵묵히 감싼다.

그 지극한 사랑이 마침내 철부지 손자의 마음에도 깊숙이 스며든다는 단순한

줄거리였으나 영화는 ‘외할머니’ 키워드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흥행에 성공했다.

▷3대가 한집에서 북적거리며 사는 가족을 보기 힘든 세상이 됐어도 손주 향한

할머니의 일편단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친가든 외가든 극진한 내리사랑에

우열을 따질 순 없으나 ‘외할머니’란 말에서 왠지 푸근한 정감과 아련한 향수

를 느낀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시인 서정주의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같은 작품이나, 7080시절 ‘논두렁 밭

두렁’의 ‘외할머니댁’이란 노래가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다. 이 같은 친밀

감을 진화적 측면에서 분석한 연구들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외할머니는 ‘전통적

모성’의 상징이자 정서적 안식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육아는 늘 벅찬 과제였다. 그 책임을 어머니가 전담하거나

주도해 왔기에 다급할 때면 할머니, 특히 ‘엄마의 엄마’가 나서는 일이 다반사였

다. 엄마와 핏줄로 이어진 아이, 그 아이가 다시 ‘엄마의 엄마’와 뿌리 깊은 인연

을 맺는 셈이다.

 

아이 양육 과정에서 힘든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외할머니 찬스’를 쓰는 것은 지

금도 마찬가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침몰한 유람선 허블레아니호에서 구조

대원이 외할머니와 그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소녀의 시신을 발견했다.

 

지하 선실 입구에서 찾아낸 최연소 희생자는 자영업을 하느라 바쁜 부모 대신에

외할머니 손에 자란 6세 유치원생이었다.

▷일 때문에 남은 남편만 빼고 어린 딸을 돌봐주는 친정 부모에게 고마움을 전하

고자 떠난 한 가족 4명의 효도여행이 한꺼번에 모두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자신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절체절명 순간에도 어린 손녀를 품에 꼭 끌어안아 준 할머

니의 애틋한 마음, 그 사랑이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가.

 

맞벌이 가정이든 아니든 일상생활과 정서적 측면에서 ‘외할머니’에게 의지하는 경

우가 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유년 시절 자신을 ‘내 강아지’라고 부르며 샘솟는

애정을 표현했던 친할머니를 ‘마음속 쉼터’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손자 손녀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큰 나무, 이 땅의 모든 할머니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는 날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