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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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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8. 06:50 카테고리 없음

 

 

 

 

 

◆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90) 박태준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부르며 날아갑니다”

 

1920년대에 윤복진의 동요 〈기러기>에 작곡가 박태준이 곡을 붙였다.

나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다. 이 노래 가사가 지닌 심오한 뜻과 아름

다운 멜로디는 오늘도 나에게 큰 감동을 준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생각하면 길을 잃은 기러기를 지금도 불쌍

하게 여긴다. 그 기러기가 엄마를 찾아 울며 날아가는 광경이 나의 가슴을

적신다.

 

차차 나이가 들어 “가도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를 읊을 때면 무한한 우주

를 생각하며 두려운 생각과 잔잔한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도 내 마음은

그렇다. 그리고 박태준의 구슬픈 멜로디를 되새기며 혼자 경건한 마음에 사

로잡히기도 한다.


그가 백낙준 총장의 뜻을 받들어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안에 처음 종교음악

과를 개설했는데 그 일에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연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발족했을 때 누구를 초대학장으로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명성이 자자했던 테너 이인범을 추천하였고 그 인선이 마땅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졸업생 중에 유명하던 독고 선이 반대하

는 자기 입장을 교무처장이던 나에게 일러주었다.

 

“그가 유명한 가수인 건 사실이지만 뜻하지 않은 화상 때문에 남들 앞에 나

서기도 꺼려하는 이인범을 학장으로 내세우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오랜 토론 끝에 박태준이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박태준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60의 고개를 넘은지 얼마 안 되던 때

였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계성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

교에 입학하여 선교사들로부터 배워 서양음악에 대한 모든 소양을 다 갖

추고 있었다.

 

그는 그 뒤에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작곡과 지휘법을 공부하여

그 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내

가 평생에 만나본 선배들 중에 박태준만큼 단정하고 겸손하고 정다운 사

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웃는 낯으로 대하였고 누구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모두가 본받아야할 기독교적인 신사였고

선비였다.

 

우리 시대의 박태준은 합창 지휘에 선구자였는데 그의 지휘법은 너무 단순

하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꾸밈이 없고 과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청

취자들을 감동케 하였다. 오늘도 모든 국민이 다 아는 〈오빠 생각〉을 한

번 되새겨 보라.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무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말 타고 서울 간 오빠가 없는 여자아이들도 그 노래를 부르며 비단구두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동심의 세계는 그토록 아름답고 박태준이 작곡한 그

멜로디를 읊조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을 것이다.

 

박태준이 곡을 붙인 〈기러기〉의 멜로디는 살아있으나 가사는 다 바뀌어

내가 오늘도 읊조리는 가사는 1절만 살아있고 윤복진은 월북했기 때문에

1950년대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사가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박태준은 150곡이 넘는 많은 노래가락을 창작하여 학교에서 교회에서 어

린이들의 정서를 고상하게 아름답게 어루만져 준 것은 사실이다. 그가 작

곡한 노래들 중에 한 곡도 부를 줄 모르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한국인이

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런 그가 친일파로 몰리게 되었다는 말만 듣고도 나는 분개한다. 일제시대

학병 나가라는 또는 징병에 응하라는 그런 가사에 곡을 붙여 준 일이 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애국애족의 대표적 작곡가이던

 

박태준이 아직 판정은 나지 않았지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니 이 시대는

한마디로 하자면 망령난 것이 아닌가? 그 친일파 색출 운동은 김대중이 대

통령이던 1999년부터 시작되어 오늘까지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2009년 발간) 4389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어쩌다 우

리들은 이렇게 너절한 국민으로 전락 했는가!

 

그들이 친일파로 낙인을 찍은 사람들은 다 하늘나라로 갔다. 고등계 형사를

하던 고약한 몇 사람은 지옥으로 갔는지 천국으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선량

한 한국인들은 모두 민족 반역자로 만드는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천국

에 들어갈 기회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천국 문을 지키는 베드로가 멀쩡한 사람을 모두 친일파로 낙인을 찍은 이 나

쁜사람들이 그의 앞에 다가오면 천국 열쇠를 든 그 손으로, 손을 흔들면서

큰소리로 “너는 안돼”라고 한마디 할 것만 같다.

 

내가 아는 박태준은 한국과 한국 국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

이였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가 있는 이들을 제멋대로 매도하고 정죄하는 것은

선량한 인간이 할 짓은 아니다. 1986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난 박태준이 몹시

그리워지는 처량한 이 밤이다.

 

 

 

◆2019/09/06(금) 끝까지 웃으면서 (494)

 

끝까지 웃으면서

 

월남 이상재는 한 시대의 걸출이었다. 고려조 이색의 후손인 그는 젊어서

한때 당대의 명사이며 초대 주미 전권 공사를 지낸 박정양의 집에 기숙한

적이 있었다. 월남은 당시의 과거 시험이 문란해진 것을 개탄하면서 박정

양의 집에서 서생처럼 지냈다고 한다.

 

하루는 박정양이 급병에 걸려 쓰러져 누웠는데 의원을 부르러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월남에게 의원을 불러오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상재는 덜

렁덜렁 의원의 집 대문에 가서 집안에 하인을 부르듯 “의원 있나?”라고

한 마디 던지니 안에서 의원의 대답이 있었다.

 

이상재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여 “박 판서가 병이 났으니 어서

가보게”라고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의원은 박 판서가 유명 인사인지라 박 판서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

는 박 판서의 병세를 많이 호전시킨 뒤에 “저를 부르러 왔던 젊은이가 누

굽니까?”라고 물었다.

 

박 판서가 “왜 묻는가?”되물으니 그 의원이 “그 젊은 사람 버르장머리가

아주 없더군요. ‘박 판서가 병이 났으니 어서 가보게’라고 한 마디 하고는

그만 사라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박 판서가 뒤에 “왜 의원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했소?”라고 월남에게 물

었다. 월남이 “심부름을 잘 하면 또 시키는 법이오”라고 답하였다고 한

다. 박 판서가 곧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비록 이 집에 기숙하고는 있지만 잔심부름이나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박 판서에게 알려준 셈이다. 이상재는 속으로 낄낄 웃고 있었을 것

이다. 끝까지 웃으면서 그는 생을 마쳤다.

 

 

박정양은 그가 초대 주미 정권 공사로 갈때 이상재를 2등 서기관으로

채용하였다.

 

김동길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