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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없는 세상 3
그 참을 ‘인’자 하나가 아내와 처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려준 것이 아닌가. 그
도끼를 감춰두고 이 가장은 자기가 집에 돌아온 것을 아내에게 알렸다. 그리고
“여보, 나 오늘 박 첨지 댁에 다녀와야겠소”라며 다시 집을 나섰다. 그의 아내는
까닭을 묻지 않았다.
그는 재 너머 사시는 박 첨지를 찾아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드렸다. “선생님이 써주신 그 글자 한 자 덕분에 우리는 죽을 고비를 넘겼습
니다.” 박 첨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하였다.
“그런가, 참을 ‘인’자의 덕을 많이 보았구만”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박 첨지는 머슴을
불러 여러 날 전에 받아 두었던 벼 열 가마를 가져왔던 사람 편에 당장 실어 보내라
고 분부하였다.
공자는 동양인이 모두 우러러보는 큰 스승이다. 그에게는 삼천 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그가 극진히 사랑하던 제자 ‘안회’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는 “슬프다. 정말 슬프다.
하늘이 나를 멸망시켰다”라며 비통해 하였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가 된
안회는 학덕이 높을 뿐 아니라 덕의 실천이 가장 뛰어나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공자에게는 그런 소중한 제자가 있었다. 지금은 공자 같은 스승이 없는 시대이다.
따라서 ‘안회’ 같은 제자도 없는 것 아닐까. 박 첨지 같은 스승이 없었다면 벼 열
가마를 놓고 간 그런 제자도 없었을 것이다.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 한심한 시
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다.
김동길
스승이 없는 세상 2
어제 한 이야기를 이어 오늘은 끝을 내겠다.
그 후 결혼한 그 아들은 신혼 재미에 푹 빠져서 박 첨지가 써준 참을 '인', 그 한 자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어느날 그는 3일 일정으로 출타하게 되었고 자기 아내에
게는 수요일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이 빨리 끝나서 이 신
혼의 가장은 화요일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희미한 석양빛이 남아있는 저녁에 집에 도착한 그는 신혼의 아내를 놀래 주
려고 안방의 문을 조금만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이불 밖으로 네 개
의 발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방문을 닫고 광으로 달려가 예리한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가 본 불
륜의 남녀를 한 번에 해치우려고 그길로 사랑방에 들어갔는데 벽에 붙어있는 글자
한 자가 눈에 들어왔다. 참을 '인' 자였다. 단숨에 다 해치우려고 결심했던 남자는
사랑방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새벽이 되기까지 참고 기다렸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의 말처럼 ‘기다리는 아침은 더디 왔다.’ 드디어 새벽이 되어 젊은
아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형부께서 오늘은 돌아오시겠구나.” 이 남자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내 이야기는 하루는 더 해야 끝이 나겠다.
김동길
스승이 없는 세상 1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마디 유언을 하였
다. “내가 죽거든 곧 재 너머 사시는 나의 스승 박 첨지를 찾아가 뵙고 무슨 일이나
그 어른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하여라”라고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그 아들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다 마치고 우선 박 첨지를 찾아갔다. “아버
님께서 돌아가실 때 저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어르신께서 하라고 시키시는 대로만
하라고 하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박 첨지는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이 하나 있는데 만약 그 물건을 찾아가
려면 벼 열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스승이 일러준 대로 며칠 뒤에 벼 열 가마를
싣고 박 첨지를 찾아갔다.
박 첨지는 벼 열 가마를 확인하고 나서 한지 한 장을 그에게 넘겨주면서 소중히 간직
하라고 하였다. 그 종이 한 장이 무슨 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심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종이를 펴보았다.
그 한지에는 딱 한 글자, 참을 인(忍) 자가 적혀 있었다. “인내심을 가져라”라는 뜻은
알지만 이 글자 한 자가 벼 열 가마와 맞바꿀만한 그런 보물인가 생각하며 그는 박
첨지에게 가져다 준 벼 열 가마가 아까워서라도 종이를 그대로 집에 가지고 갔다.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다가 사랑방 담벼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박
첨지를 원망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계속 될 것이니 기대하시라.)
김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