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버티기, 왕조 때보다 더하다 |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 수립 직후인 1949년 5월 당시 최대교 서울지검장은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했다.
이인 법무부 장관은 불기소를 지시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 를 택했다. 선거 비용 충당을 위해 공금을 유용하고 기업체로부터 뇌 물을 받은 혐의였는데, 배임 및 배임교사, 뇌물수수, 사기, 횡령 등의 죄목이 적용됐다. 대적 신임도 받았다. 임 장관은 192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로스앤 젤레스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 대통령을 도왔으며,
첫 부인과 이혼 후 혼자 살던 이 대통령이 임 장관에게 구혼했지만 거절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임 장관은 수사망이 좁혀 오자 경무 대를 찾아가 이 대통령에게 구명을 읍소했다.
경무대의 압박에 권승렬 당시 검찰총장은 “검찰관의 신분을 보장한 입법 정신에 배치된다”며 버텼고, 최 지검장도 임 장관을 기소할 수 있었다. 임 장관 본인과 이인 장관은 기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했다. 지시에 따라 일반 재판부가 아닌 특별재판부가 구성됐고, 재판정 에서 피고인들은 모두 검찰 진술을 번복했고 법원은 이를 수용했다.
결국 1·2·3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어느 판사는 외압을 실토하 기도 했다. 어쨌든 헌정사상 첫 장관 기소는 검찰의 고군분투로 끝났다. 이후 임 장관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문 준영 저 ‘법원과 검찰의 탄생’) 모르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조 장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우려 되는 대목이다.
대다수 국민이 문맹이었고,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지만 검찰은 거악(巨惡)에 맞섰다. 지금 검찰이, 훨씬 더 민주주의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의 선배들에 비해 제대로 할지 지켜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들로 장악된 ‘코드 사법부’에 있다. 이승만식의 특별재판부도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편향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종범(從犯)들에게 증거인멸과 해외도피를 지시하고, 이들이 이미 구속돼 있는데도 조 장관 동생의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법원은 조 장관과 부인 정경심 교수의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도 사 생활 침해라는 이유로 두 차례나 기각했다.
왜 조 장관이 ‘무죄 추정의 원칙’ ‘법 절차’를 강조하는지 이제야 짐 작이 간다. 검찰이 청와대의 외압을 물리치고 기소하더라도 자신이 완성한 ‘코드 사법부’를 믿기 때문이다. 만 조 장관의 ‘버티기 행태’를 보면 말문이 막힌다. 조 장관은 8일 부인 정 교수가 3차 소환 조사를 받고, 동생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로 한 날 기자회견을 갖고 검찰 개혁안을 내놨다.
핵심 내용이 검찰 특수부 축소, 별건 수사 금지, 영장 재청구 자제 등이다. 모두 자신과 가족들의 수사와 직결돼 있다. 지금 조 장관 일가를 수사하고 있는 곳이 특수부이고
다른 검찰청에서 검사들을 파견받고 있는데 이를 축소하겠다는 것은 손발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영장이 기각된 동생에 대해 검 찰이 영장 재청구를 하겠다는 방침인데 조 장관의 개혁안에 따 르면 이것도 자제해야 한다. 사표를 내고 물러나야 했다. 그다음 제3의 사찰기관에서 조사해 대간이 옳으면 탄핵받은 관료가 물러나고, 그르면 오히려 대간 이 물러나야 했다고 한다.
절대권력인 왕도 이런 역할을 하는 대간의 신분을 함부로 할 수 없게 철저히 보장해 줄 정도로 권력기관의 견제와 균형 원리가 작동했는데 수백 년이 흐른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조선 시대 만도 못한 상황이 두 달이 넘도록 벌어지고 있다. 것은 나쁜 선례’라고 했는데, 역사는 ‘합리적 혐의’만으로도 공 직에서 물러나야 했음을 보여준다.
결백 여부는 수사와 재판에서 가려질 것이다. 국가기관이 기소할 정도면 공직을 수행해선 안 된다는 것이 고금의 상식이다. 왕조 시대에도 공직을 그렇게 여겼다. 견제와 균형의 국가 시스템이 조국 사태로 무너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