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한현우 논설위원
입력 2020.01.02 03:16
1979년 9월 16일 새벽 2시, 베를린 장벽 인근 동독 작은 마을 산 중턱에서 열
기구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 안에는 아이 네 명을 포함한 두 가족 여덟 명이 타
고 있었다. 열기구는 두꺼운 천을 재봉틀로 이어 박아 만든 것이었다.
두 가족은 바람을 타고 20여㎞를 날아간 뒤 연료가 떨어져 착륙할 수밖에 없었
다. 내려앉은 곳이 어딘지 몰라 불안에 떨던 이들 앞에 서독 경찰이 나타났다.
훗날 이들은 "경찰차가 아우디인 걸 보고 비로소 안심했다"고 말했다. 이 열기구
탈출은 수많은 동독 탈출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례로 꼽힌다.
▶분단 당시 동독에서는 온갖 형태의 탈출이 감행됐다. 1964년에는 베를린 장
벽 밑에 길이 145m의 땅굴을 뚫어 57명이 탈출했다. 동베를린의 건물에서 서
베를린 건물에 밧줄을 묶은 화살을 쏜 뒤 강철 로프로 연결해 국경을 넘은 사람
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동독 바다에 뛰어들어 45㎞를 헤엄치며 덴마크로 가던 중 서독 배에
발견돼 구조되기도 했다.
▶한국인 중에는 단연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탈북이 가장 극적이다. 이들은
1978년 차례로 납치된 뒤 북한에서 멀쩡히 활동 중이라 해서 자진 월북 아
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1984년 영화를 찍는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빈에 간 두 사람은 평소 알고 지
내던 일본인 기자의 도움을 받아 북한 감시원을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탈
출하는 데 성공했다.
▶극적인 탈출은 영화 소재로 자주 쓰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중 '알
카트라즈 탈출'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알카트라즈 감옥을 탈출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
1962년 죄수 네 명이 2년간 숟가락으로 파낸 땅굴로 나가 뗏목을 타고 감옥을
탈출했다. 이들은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섬 전체가 감옥인 알카트라즈
를 빠져나간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수십m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드는 영화 '빠삐용', 땅굴을 파서 탈옥한 뒤 교도소의
부패를 고발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도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다.
▶일본 검찰이 기소 후 가택연금 중이던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자동차 회 장이
도쿄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뒤 레바논에 나타났다. 그는 성명에서 "나는 불의와 정
치적 기소로부터 해방됐다"고 말했다.
곤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음악회를 연 뒤 악기 케이스에 숨어 집을 빠져나
간 것으로 추정된다. 말 그대로 '세기의 탈출극'이라고 할 만하다. 세계적 이목을
끌던 거물 피의자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놓쳐버린 일본 당국에 망신살이 뻗쳤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1/20200101017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