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정권 ‘김원봉의 나라’ 꿈꾸나 |
이용식 문화일보 주필 군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독 립운동 역량을 결집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군사적 역량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 가 됐다.” 김원봉 서훈을 위한 청와대 청원이 전개됐고, 반대편에 서는 6·25 남침 주역을 ‘국군의 뿌리’와 연결한 데 대한 반발이 일었다. 올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총선에서 압승한 여당이 아예 근·현대사를 다시 쓰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현재 100세인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 반대 및 ‘친 일파 파묘’ 주장은 신호탄이다. 이라는 말을 즐겼고,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현재를 지배 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완력으로 역사를 뒤집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권력이 바뀌면 금 방 부메랑이 된다. 여당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역사 공작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우선, 100년 집권 론이나 사회적 패권 교체의 기초 작업이다. 둘째, 효용이 다한 적폐 청산의 후속 시리즈가 필요하다. 셋째, 다음 대선에 유리 하다. 넷째, 건국·산업화 주역들을 흠집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석이다. 문 대통령이 높이 평가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와해를 위 해 총력을 다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의열단원 김두봉·김원봉의 취소운동 이 극렬하였다’고 기록하고, 특히 김원봉에 대해선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까지 전했다.
김원봉은 인민공화국에서 국가검열상·노동상을 맡았고, 북한 6·25 훈장의 첫 서훈자도 됐다. 여당이 ‘파묘’까지 거론한 백선엽 장군은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군인이다.
매슈 리지웨이 6·25 당시 유엔군 사령관과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백선엽 회고록 영문판에 이렇게 썼다. ‘지연전술을 펴며 후퇴해 유엔군 참전 시간을 벌었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북한군의 대구 함락 작전을 막아냈고, 인천 상 륙작전 뒤엔 미군 1기갑사단과 거의 동시에 평양까지 진격했다. 전투를 하면서 신병을 훈련시켰고, 병참 기반을 닦았으며, 갈수록 강한 군대를 만들어냈다.’ 보다 김원봉의 나라에 더 정통성이 있다는 식으로 기술한 교과서도 많다. 이승만·박정희는 한사코 깎아내리면서 북한 세습 독재자에겐 절절맨다.
핵무기와 최악의 인권 유린도 외면한다. 김여정 협박에 금방 대북 전단 금지 조치를 취한다. 이젠 3부(府)를 장악했으니 마음만 먹 으면 인공(人共)식 국정도 가능하다. 람이다. 박정희 세대인 미얀마(당시엔 버마)의 아웅산 장군은 1944 년 일본 천황에게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일본 도움으로 군대를 만 들었지만, 친일 비난이 아니라 건국 영웅 겸 국군 창시자로 존경 받는다.
딸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다. 1980년 문 대통령의 사법시험 통과에 결정적 도움을 준 김점곤 교수는 백 장군의 부하로 여수· 순천 반란 토벌과 6·25전쟁을 함께했고, 평생 그를 가장 존경했 던 직속 후배 군인이었다.
이처럼 개인에게도 나라에도 수많은 우여곡절이 교차한다. 그런 복잡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 관 건립에 앞장섰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 구상까지 추진했다. 죄 문제를 정리하는 일이다. 통일을 위해서도 넘어야 할 산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5·18 기념사에서 “진실이 드러날수록 용서와 화해의 길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했다.
전범 처리의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한 제네바 제4 협약이 1949년 마련됐고, 첫 조사단이 6·25 때 활동했다.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판례도 있다. 양민 학살과 요인 납북, 미송환 국군포로 등 규명할 문제가 많다. 남북 공동 조사도 필요하다. 분열시키고 미래 아닌 과거로 퇴행시킨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의 지도 의심받는다.
백선엽과 김원봉 누가 추앙받는 나라를 꿈꾸는가. 호국 영령 앞 에서 문 대통령부터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