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네 번째 함구령
조선일보 이동훈 논설위원 2020.06.24 03:18
정치권에선 수시로 함구령(緘口令)을 내린다. 민감한 현안에 대해 이
말 저 말 말고 아예 입을 다물라는 것이다. 인사나 정책 보안을 지키
기 위해서도 함구령이 떨어진다.
비공개 의원총회장에서 원내대표가 의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장
면을 몰래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뜻밖에도 지시가 아주 구체적이었
다. 언론이 이런 질문을 해올 수 있는데 이렇게 답하라면서 예시 질문
과 모범 답안까지 제시했다.
그러고 "우리가 이런 얘기 한 것도 언론에 절대 얘기해선 안 된다"는
당부까지 덧붙였다. 과거 어떤 당대표는 함구령을 어긴 의원을 '촉새'로
규정했다.
"나불거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경고를 전해 들은 주변 인사들은
"입이 봉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얼어붙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권력
자들은 아랫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제일 혐오하는 것이 인사 내용 발설이었다. 김이 빠진다는 것이다.
개각 내용 일부가 신문에 보도됐다고, 내정하고 통보한 장관을 바
꿔버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2004년 17대 국회 다수당이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의원들의 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초선 108명이 각자 자기주장과 소신을 자유롭게
내세워 혼선을 일으키자 이들을 '108번뇌'로 부르기도 했다. 참다못한
다선 의원이 "군기를 잡겠다"고 하자 "물어뜯겠다"고 한 초선 의원도
있었다.
▶민주당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 압박 발언이 계속 나오자 이해찬
대표가 "윤 총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며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
데 이 대표의 함구령은 총선 이후 벌써 네 번째다.
얼마 전 '윤미향 의원 의혹'에 대해 "개별 의견을 분출하지 말라"고 함
구령을 내렸다. 당론을 따르지 않은 금태섭 전 의원을 징계하면서 그
문제에 입을 닫으라고 했다. 개헌 논의도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
"전체주의 정당이냐" "운동권 MT 같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 대표는 '108번뇌' 전철을 밟지 말자는 생각에 때마다 함
구령을 내리는 모양이다.
▶의원은 국민이 선출한 헌법기관이다. 그 책무의 본질은 '말하는 것'
이다 . 그래서 발언 내용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도 받는다.
그런 민주당 의원들이 아무 권한도 없는 당대표의 함구령에 순응한다.
떠들다가 선생님이 '조용!' 하면 일제히 입을 닫는 초등생들을 보는 것
같다. 열린우리당이 망한 것은 함구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리한 이념
형 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며 독주, 폭주했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이
걷고 있는 그 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4/20200624000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