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14. 06:45
카테고리 없음
20대의 빚투 [횡설수설/박중현]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엔 20여 년 전 졸업앨범 속에서 활짝
웃고 있지만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진 동기생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게
사라진 사람 가운데 일부는 김대중(DJ)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위
기 극복을 위해 썼던 두 가지 경기 부양책의 후유증 탓에 친구들 주변
에서 종적을 감췄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출범한 DJ 정부는 내수를 살리기 위해
발급 조건과 현금서비스 한도 등을 완화하며 신용카드 사용을 권했다.
1998년 ―5.5%까지 떨어졌던 경제성장률이 1999년 11.5%, 2000년
9.1%로 급등한 데는 수출 증가와 함께 신용카드 사용으로 인한 소비
증가가 영향을 미쳤다.
빚의 무서움을 모르는 젊은 직장인, 대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서명만 하
면 발급해주는 신용카드 여러 장을 지갑에 넣어 다니며 펑펑 돈을 썼다.
▷또 다른 부양책인 ‘벤처 붐’은 신용카드가 생긴 청년 중 일부를 주식
투자로 끌어들였다. 대수롭지 않은 기술을 보유하고도 순식간에 수십,
수백 배 주가가 오르는 걸 본 청년들은 카드대출을 받아 벤처 주식에
‘몰빵’했다.
2000년대 들어 버블 붕괴로 많은 주식이 휴지조각이 됐고 ‘카드 돌려
막기’로 빚을 갚던 다수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코로나19 이후 급증한 유동성 탓에 주가가 폭등하자 20대 청년들이
‘빚투’(빚내 주식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20대가 투자를 위해 증권사
에서 빌린 돈인 ‘신용공여액’이 2년 반 만에 2.3배로 늘었다.
몇 달 만에 수십 % 이익을 낸 투자자들을 지켜보던 20대들이 빚을 내
‘동학개미’에 합류한 것이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선 무료 주
식 앱을 쓰는 청년 ‘로빈 후드’가, 중국에선 풀처럼 쑥쑥 잘 자란다는
뜻의 ‘청년 부추’들이 증시를 달구고 있다.
▷2030 개미들은 최근 정부가 주식 투자 수익에 양도소득세를 물리려
하자 온라인 공간에서 강하게 반발해 시행 시기를 늦추는 등 양보를
받아냈다.
면세점이 높은 한국에서 소득세, 재산세를 좀처럼 낼 일이 없는 청년
세대의 첫 번째 조세저항이라 할 만하다. ‘주식 자산’을 보유하고 세
금을 내게 된 청년층이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의식과 권리를 각성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청년의 주식 투자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빚투는 위험하다. 청년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부모 세대와 같은 방법으로 부의 축적과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할 것이란 조바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형 우량주에 집중 투자한다는 점에서 벤처 버블 때보다 위험은 작다
지만 다락같이 오른 주가는 실물경제의 작은 충격에도 언제든 급락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