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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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장관
조선일보 임민혁 논설위원 2020.08.27 03:18
박근혜 대통령 첫 방미(訪美)는 수행원의 성추행 사건으로 미 의회
합동 연설 등 공들인 행사가 다 묻혀버렸다. 홍보수석이 "국민 여러
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 사과문이 또 논란이 됐다. '대통령이 사과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오히려 사과를 받느냐'는 것이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대통령은
사과받을 위치에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메르스 사태 때 감염이 발생한 병원장이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을
때도 민주당은 "대통령이 최종 국정 책임자인데 이런 본말 전도가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민주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도 '대통령에 대한 사과'가 걸핏하면
나온다.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정무수석도, 의원 시절
피감 기관 돈으로 해외 출장을 다닌 사실이 드러난 금감원장도 사퇴를
발표하면서 문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청와대 직원들의 음주 운전 등 일탈이 잇따르자 비서실장은 "대통령께
면목 없고 국민께 죄송하다"고 했다.
▶그제 국회에서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이 불편한 위치에
계시게 된 점에 대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뉴질랜드 정상
통화에서 '외교관 성추행' 문제가 제기된 데 대한 사과였다.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정상 통화에서 불쑥 튀어나왔으니 외교부는 할 말
이 없게 됐다. 하지만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행정부 내부 문제다.
대통령이 외국 정상에게 성추행 문제 항의를 받으면서 나라 전체가
망신을 당했다.
장관이 내부적으로 대통령 질책을 받고, 국민이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장관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에게 사과를
한다.
▶고위 공직자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 미안
한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국민이 지켜보는 공개 자
리에서 '대통령께 송구'부터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대통령만 보이고 국격이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나. 행정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대통령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외교부의 잇단 의전 사고에
도 장관을 계속 신임한 것도 대통령이다. 대통령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대통령을 향한 잦은 사과는 '소신(小臣)을 죽여달라'며 신하들이 일단
엎드리고 보는 사극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에서도 수해 피해가
나자 간부들이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원수님(김정은)께서 험한 진창
길을 걸으시게 했다"고 반성문을 쓴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통령에게 사과를 하는 공직자들은 줄을 잇는데 직언을 했다는 얘기는
단 하나 들리지 않는다.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