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토건대통령
감축 약속한 SOC 예산, 내년 역대 최대 고속철, 공항… 곳곳서 정치토건으로 회귀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정부는 2017년 출범 당시 재정 우선순위를 토목 위주의 사회간접자본(SOC)
에서 사람 위주로 바꾸겠다고 했다. 국회에 낸 5년 치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도 SOC 예산을 연평균 7.5% 줄이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해 정부는 이듬해인 2018년 예산안을 대규모 확장재정형으로 짰지
만 SOC는 되레 20.2% 줄였다. 역대 최대 규모 감축이었다. 절대액(17조7000
억 원)도 14년 전으로 쪼그라들었다.
2000년대 들어 보수와 진보를 가른 말 중 하나가 ‘토건(土建)족’이다. 외환위
기 이후 정보기술(IT)과 글로벌 중심으로 산업 생태계가 재편되면서 토건은
구시대의 연관어가 됐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 당시 주택 공급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자 진보 쪽에선 “서
울을 더 이상 토건족에게 맡겨 둘 수 없다”며 부동산 문제를 정치세력 간 대결
의 문제로 바꿔 놓았다. 논란의 절정은 4대강 사업이었다.
2017년 초 문재인 대선 후보는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쏟아부은 예산
22조 원으로 연봉 2200만 원짜리 일자리 100만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SOC 예산 감축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물론 현 정부에서 일자리 100
만 개가 순증한 적은 없다).
토건과의 결별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자 1년 만에 입장을
바꿨다. SOC 예산은 2019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내년에는 정부안 기준
(26조 원) 역대 최대다. 당초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제시한 목표치(16조2000
억 원)보다 60% 많다.
정책 방향을 틀려다 보니 원조 토건족이 무릎을 칠 만한 아이디어도 속출했다.
‘생활 SOC’는 체육시설이나 주민 편의시설을 신축 또는 개·보수하는 신개념
토건이다. 2022년까지 지방비를 포함해 48조 원을 투자한다. 문 대통령은
이를 두고 “토목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 했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사업 23건을 일괄 발표한 것은 과거 정권이라면
시민단체 눈치가 보여서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정부는 총 24조 원이
들어가는 사업들을 사전 평가 없이 시작한다. 이 중 7건은 이미 예타에서 경
제성이 안 나와 탈락한 사업이다.
23건에는 전남 무안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건설할 새만금 국제공항,
남부 내륙 172km 구간에 고속철도를 놓는 사업도 들어 있다. 개별 건마다
국책사업급이다. 시도별로 한 곳 이상 안배한 것도 그렇지만 국가 균형발전
으로 포장한 것도 토건족은 생각도 못 했을 명분이다.
내년부터는 한국판 뉴딜로 덧칠한 SOC도 늘린다.
김해신공항이 백지화되고 가덕도신공항이 들어선다면 이 정부 토건의 끝판
왕이 될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난 사업을 재차 뒤집어 10조 원 또는 그 이상을
쓰는 다른 사업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선 예타까지 면제해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지방의 대형 SOC는 해당 지역에서 돈을 대는 게 아니라 국비를 끌어다 쓰고,
운영 손실이 나도 국가에서 메워주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정치인과 지역
표심 모두 사업을 일단 벌여 놓는 게 유리하다. 만약 지역 재원으로 짓고, 완공
후에도 지역에서 운영하라고 해도 이렇게 밀어붙일 수 있을까.
대통령이 SOC 투자로 일찌감치 돌아선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가늠할 수 있는 건 지금 계획대로면 차기, 차차기 정권에 가서도 전국 곳곳에
‘문재인 고속철’ ‘문재인 공항’이 준공될 것 같다는 것이다.
토목과 건축이 고대부터 정치행위였던 게 이런 걸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