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7.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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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선미] ‘찐멘토’ 윤여정
본인이 말하길 “특별히 전성기나 대표작이 없었던 것 같다”는 나이
일흔넷의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상 여우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시아계로는 5번째다.
이미 거머쥔 다른 여우조연상만 33개.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
는 우리 사회에서 ‘조연’이 이토록 주목받은 적이 있던가. 남다른 멘토
로서 그의 모습은 영화 ‘여배우들’(2009년)에서 이미 돋보였다.
이미숙 고현정 등 쟁쟁한 후배 여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는 배
우들의 실제 삶이 반영된 즉흥 대사가 많았다. 윤여정은 후배들에게 조
언했다. “인간의 본성이 나만 주목받고 싶은 것이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살아보니 박수를 받으면 돌멩이질도 그만큼 받더라. 세상엔 공짜가 없
으니 분할 것도 억울해할 것도 없다.” 윤여정은 1966년 TBC 탤런트 공
채 3기로 데뷔해 연기생활 55년째다.
한양대 국문과 재학 시절 신종 직업으로 뜨던 탤런트에 도전했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딸들을 키우는 양호교사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서.
드라마 ‘장희빈’과 영화 ‘화녀’로 유명해진 뒤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
가서 13년을 살았지만 헤어졌다.
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운 건 그였다. 그의 어머니도, 그 자신도 ‘생명력 강
한 미나리’였다. ‘미나리 리더십’의 핵심은 겸손과 섬김이다. 겸손은 자신
의 객관화에서 출발한다.
“미모도 재능도 없기 때문에 노력한다”는 그는 박카스 아줌마(영화 ‘죽여
주는 여자’)로도 치매 걸린 할머니(영화 ‘계춘할망’)로도 변신한다. 조연
이라고 뒤로 빠지지도 않는다. 주연이 빛나도록 배려하면서 필요할 때 나
선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삶은 밤을 씹어 손자에게 주는 장면,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라는 핵심 대사는 그가 제안한 것이다. 제작비 200만 달러
(약 22억 원)의 초저예산 영화를 찍으며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 것도 그였다.
▷윤여정은 욕심의 힘을 뺀 궁극의 나이스 스윙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 들
었다고 무게 잡지 않고, 밥값을 내고, 남 탓 안 하며, 유머가 있다. 아카데미
후보로 오르자 “여러분의 응원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워 올림픽 선수들
의 심적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창창한 나이일 때는 빨리 깨질수록 좋다.” “나는 나같이 살면 된다.” “인
생이 별거 아니다. 재밌게 사는 게 제일이다.” 윤여정은 요즘 말로 ‘찐멘토’
(진정한 멘토)다.
기성세대도 미래세대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그에게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얻는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마저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