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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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봉투 3개’를 준비할 때
궤도수정 失機 반복한 정부 경제정책 ‘알박기’ 포기해야
“책상 서랍에 봉투 3개를 넣어 뒀다. 큰 위기가 올 때 한 개씩 꺼내 보라.”
새로 취임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떠나는 전임자가 이렇게 귀
띔했다. 얼마 뒤 큰 어려움이 닥치자 CEO는 첫 번째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전임자를 비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경영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봉투 3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직의 새 수장은 임
기 초 문제에 부닥칠 때 ‘전임자 탓’을 하게 마련이다.
탄핵으로 물러난 박근혜 대통령이 봉투를 남겼을 리 만무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 기술을 현란히 구사했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고 출범해 소
득주도성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중 처음으로 경제정책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랬다.
2018년 최저임금이 16.4% 인상되자 취업자 수 증가폭이 전년 31만6000
명에서 9만7000명으로 뚝 떨어졌다. 문 대통령은 “오래 계속된 신자유주
의 경제정책이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해 성장 동력을 떨어뜨리고 그와 함께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돼 왔다”고 했다.
무리한 임금 상승으로 서민 일자리가 줄어든 걸 전 정부들 탓으로 돌린 것
이다. 2018, 2019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이 2%대로 떨어지면서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이야기 속 CEO가 열어본 두 번째 봉투엔 “사람을 바꾸라”는 메모가 들어
있다. 실패의 책임을 물어 대대적 인사를 단행하면서 경영전략을 수정하라
는 뜻이다. 현 정부도 개각과 정책 전환이 필요해졌는데 작년 초 시작된 코
로나19가 엉뚱한 영향을 미쳤다.
최악의 경제 성적표는 팬데믹의 높은 파고에 묻혔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힘입어 지난해 4월 총선에서도 압승했다. 돈을 풀라는 청와대, 여권 요구에
저항하는 척 부응한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자리를 지켰다.
비켜간 줄 알았던 위기는 대통령이 “자신 있다”던 부동산 문제에서 다시
터졌다. 3년 넘게 공급 확대 없이 규제만 강화해 눌러놨던 집값이 저금리
를 타고 폭등했다. 준비 없이 시행한 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요구권은 전
세의 씨를 말렸다.
장관 교체 등을 신속히 실행에 옮겨야 했지만 “전 정부에서 부동산 규제들
이 다 풀어진 상태에서 자금이 부동산에 몰린 상황”(김현미 국토교통부 장
관)이라며 또 ‘전임정권 탓’을 했다.
하지만 그 카드의 유효기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3년 6개월 최장수 국토부
장관은 작년 말 물러나야 했다. 여론에 떠밀렸다곤 해도 그때가 정책 궤도
를 바꿀 거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런데 청와대는 ‘공공주도 개발주의자’ 변창흠 국토부 장관을 기용하며 기
존 정책기조를 강화했다. 곧이어 변 장관이 사장을 지낸 한국토지주택공사
(LH) 임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터졌다. 일자리 참사, 증세로 누적된 국민
분노에 도덕성 불신까지 겹친 복합위기 속에서 4·7 재·보궐선거를 치렀다.
세 번째 중대위기를 맞은 조직의 장에게 남겨진 마지막 메시지는 “후임자를
위해 봉투 3개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돌이키기엔 늦었으니 마무리에 신경
쓰라는 주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대권 도전을 위해 사의를 표한 정세균 국무
총리 자리에 홍 부총리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다만 대통령 임기가 13개월 남은 시점에 정부 대표 싱크탱크인 한국개발
연구원(KDI)의 3년짜리 원장으로 실패한 ‘소주성’ 입안자인 홍장표 전
경제수석을 앉히려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현 정부에서 못 핀 소주성의 꽃이 차기 정부에서 활짝 개화하길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미련일 뿐이다. 어떤 후임자도 그런 부담스러운 유산은 물
려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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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