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행복 찾기
"누군가 널 선택하면 최선을 다해라. 담배 피우지 말아라. 못된 건 가까이 하지 말아라,세상엔 좋은 것도 많다. 여자를 사귀면 공주처럼 대해라,귀한 존재다. 돈을 벌어라,돈이 있으면 많은 게 쉽다. 늘 가까이 있으마. " 영화 '존 큐'에서 죽기를 각오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해주는 눈물의 조언이다.
영화의 주제는 부성애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주인공 부부는 심장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뛴다. 그러나 병원 측의 반응은 냉담하다. 의료보험조차 안 된다는 이유다. 아버지는 결국 병원에 잠입,"내 아들을 심장 이식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인질극을 벌인다.
가족애를 붙들고 늘어지는 건 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슈퍼맨의 청소년기를 다룬 TV시리즈 '스몰 빌'은 남다른 능력의 아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는 양부모의 극진한 사랑,최근의 화제작 '프리즌 브레이크'는 형제의 뜨거운 우애를 보여준다. '과학수사대 마이애미'편 반장은 주위의 눈총에도 불구,말썽쟁이 동생의 뒷처리를 도맡는다.
영상물을 비롯한 대중매체가 뭔가 강조하는 건 현실이 그렇다기보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의 반영이다. 미국 영상물이 장르와 형식에 상관없이 '가족'에 매달리는 것도 미국 사회의 가족 해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일지 모른다. 어떻게든 가족의 가치를 알리려는 절박함의 표시라는 얘기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행복 찾기'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 또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증거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외에서 조사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78개국 중 102위,국내기관에서 알아본 서울시민 행복지수는 세계 10개 도시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는 결과만 봐도 그렇다.
행복지수를 정하는 건 주로 돈ㆍ건강ㆍ인간관계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1만∼1만5000달러면 소득이 늘어도 행복지수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가족의 화목과 사회적 신뢰가 중시된다는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정하는 일은 어렵다. 분명한 건 돈과 출세 이상으로 가족의 사랑이 소중하다는 점이다.
[여적] 학병(學兵)
‘이 성전(聖戰)의 용사로/부름밧은 그대-조선의 학도여/지원하엿는가, 하엿는가/-특별지원병을-/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부모 때문인가/충 없는 효 어듸 서리/나라업시 부도 어듸 잇시리’ 춘원(春園)
춘원은 ‘대문호 답게’ 일본군의 강제 징집을 앞두고 고민을 거듭하던 당시 우리 학생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파악했다.
그의 부친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로 왜정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학병을 기피하면 미구에 가족에 닥칠 어려움 때문에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 자 일본의 도조 히데키 내각은
이때부터 실제 입영이 이뤄지는
학병들이 주로 끌려간 곳은 만주나 인도차이나 반도, 남태평양 등이다. 처음에는 한국인 학병들을 믿지 못해 배치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하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나 인간어뢰 특공대에 투입했다. 얼마나 많은 학병들이 동원됐는지, 이중 얼마나 죽었는지는 해방 직후 일본의 철저한 자료 파괴로 알 길이 없다. 그저 수많은 청년이 꽃다운 나이에 끌려갔으리라는 추측만 있을 뿐.
춘원과 육당
길섶에서] 동병상련 /함혜리 논설위원 |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났다. 수첩 정리를 하다가 4년 전 적어 놓은 전화번호가 눈에 띄어 긴가민가하면서 메시지를 보냈더니 즉각 회답이 왔다. 같은 대학을 다니진 않았지만 함께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학교 친구들보다 더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든 나이인데 그 친구도 아직 싱글로 남아 있었다. 성격 좋고, 허우대 멀쩡하고, 재산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있는 친구다. 사귀는 여자도 많았던 것 같고 소개팅도 부지런히 한 것 같은데. “대충 결혼하지 그러냐.”라고 핀잔을 줬지만, 나 자신 이런 소리 들을 때 가장 서운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내 “인연을 아직 못 만난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몇년 전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던 어떤 선배의 안부를 물었다. 그 선배도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보다 세살이나 위인데.“어머나, 어쩌다가!”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똑같은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앉아서 그 선배 걱정을 했다.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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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마을에 가면 밭가에 어른 주먹 크기의 돌들로 둥그렇게 쌓여 있는 무더기 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비오는 날 그곳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린다며 가까 이 가기를 꺼렸다. 사람들은 이를 ‘애장’, 즉 애기 무덤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5,6세 미만 어린 아이가 죽으면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 땅에 묻기보다 밭가에 돌무더기로 덮어 놓았다.
중국인들은 어른과 똑같이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죽은 아이가 하늘나라에서 편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애장은 지독한 패러독스, 즉 역설이다. 예로부터 금지옥엽 귀한 자식일수록 험악한 이름을 붙여줬다. 반상의 구별 없이 어린 아이 이름에는 ‘개똥이’가 제일 많다. 마마나 역병을 옮기는 ‘나쁜 귀신’이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에게 “요 미운놈!”이라며 볼을 꼬집는다. 아무렇게나 돌을 주워다 밭가에 죽은 자식을 묻는 장례 방식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너무도 지극한 역설적 사랑 표현이다. 잘 먹이지 못하고 사랑도 듬뿍 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보낸 자식을 자신이 늘 일하는 밭가에 돌무 더기로 묻고 오갈 때마다 떠올려 생각하자는 것이다. 늘 옆에 두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아프가니 스탄 바그람 기지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이어 현장으로 달려간 부모의 눈물 속에 그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 땅의 모든 부모들도 함께 울었다. 장례식 일정을 미뤄서라도 죽은 자식을 좀더 옆에 두고 싶다는 윤 하사 부모의 심정은 어린 자식을 돌무더기로 애장을 지냈던 시골 아낙의 자식 사랑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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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적을 지녔던 최초의 임금은 북인(北人) 임금 광해군일 것이다. 그와 북인은 임란 극복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소수 당파의 정권 독점은 심한 반발을 낳았다.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과 남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했다. 광해군이 서인 영수 이항복(李恒福), 남인 영수
당적을 자주 바꾼 임금은 숙종이다. 그는 즉위 초 남인을 지지했다가 재위 6년(1680)에는 서인에 정권을 주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했다. 재위 15년(1689)에는 남인 장희빈의 왕자 생산을 계기로 남인에 정권을 다시 주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숙종은 재위 20년(1694)에는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우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는 노론을 지지했다.
기사환국 때 효종의 외손자 홍치상(洪致祥) 등 18명이 사형당한 것처럼 숙종이 한 번 당파 를 바꿀 때마다 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국왕 당적 보유의 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난 이가 영조이다. 노론의 도움으로 즉위한 영조는 소론이 경종 독살 혐의를 제기하자 소론도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정국 파탄을 막았다.
그러나 재위 31년(1755) 소론 강경파가 자신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인 나주(羅州) 객사(客 舍)사건이 발생하자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소론을 내쫓았다. 결과는 재위 38년(1762) 소론 성향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극으로 나타났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부친을 죽인 노론과 타협하는 통합의 정치를 실천하며 미래를 지향했다.
그 결과 정조는 조선 후기에서 가장 성공한 임금이 됐다. 우리 국민들은 특정 당적을 지닌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만 일단 당선이 되면 소속 당파를 초월한 국정 운영을 원하는 성향이 강하다. 국가원수가 당파적 시각을 가질 때의 문제는 왕조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지난 4년 임기는 잘 보여줬다.
탈당한
횡설수설/
한국은 ‘발굴 공화국’으로 불릴 만하다. 현 정부가 균형발전 명목으로 ‘전국 개발사업’ 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문화재 발굴 조사가 급증하고 있다. 사업 시행자는 혹시 땅속에 묻혀 있을지 모르는 문화재의 훼손을 막기 위해 먼저 발굴조사 를 하도록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돼 있다. 지난해 발굴조사는 1300건으로 1999년 331건의 3.9배로 늘었다.
▷조사 규모도 놀랍다. 충남 연기 공주 지역에 들어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경우 2200 만 평이 발굴조사 대상이다. 광복 이후 최대의 국토개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고고학계는 폭주하는 발굴조사 요청에 즐거운 비명이다. 1990년대만 해도 고고학계의 발굴조사는 연간 100∼200건에 불과했다.
그중 상당수는 순수한 학술연구 차원의 발굴조사였다. 하지만 최근의 발굴조사는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 파헤치기식 개발 붐에 따른 것으로 고고학계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물량이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발굴 인력이 크게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는 ‘부실 발굴’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여 놓았다. 시행기관들은 가능한 한 빨리 발굴조사를 마쳐야 공사에 착수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을 재촉하기 일쑤다. 연간 수천억 원에 이르는 발굴자금 이 고고학계에 유입되면서 ‘발굴조사는 복마전’이라는 소문이 나돈 지도 오래다.
최근 고고학자 2명이 8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교수는 발굴비용을 빼돌려 아파트를 구입한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대부분 고고학자들은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다. 비리를 저지른 사람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겠지만 ‘개발’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가난한 인문학자들까지도 하루아침에 ‘돈의 노예’로 전락시킨 듯해 안타깝다.
고고학계는
분수대] 고노 담화
1993년 8월 발표된 '고노 담화'는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시인하고 사죄를 표명한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다. 당시 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현 중의원 의장)의 명의로 발표된 담화는 1년8개월간의 조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위안소의 설치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며, (중략)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행했지만 감언.강압에 의한 사례가 많았고, 나아가 관헌이 직접 가담한 일도 있었다." 그의 증언은 91년 아사히 신문에 집중 보도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 을 촉발시켰고 한국에서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잇따라 나왔다. 저명 역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제주도 현지 조사를 거쳐 "요시다 의 말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며 요시다를 '직업 적 작화사(作話師)'로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요시다는 "일부 사례의 시간. 장소에는 창작이 가미됐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요시다가 강제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비를 들여 한국 천안에 '사죄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고노 담화 폐기 또는 수정론 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논리가 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입증해 주는 정부 공식 문서가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안의 성격상 강제 동원 사례를 공문서에 기록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에 앞서 살아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강제 연행을 증언하는 위안부 여성은 한국.필리핀.대만.중국 등 아시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까지 수백 명에 이르는 데도 말이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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