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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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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6. 11:26 一石 컬럼

아들 사 형제가 모두 현대에서 생활을 한 가족이 있었다.
넷 모두가 대단한 실력을 가지었기에 커다란 몫을 하였었다.

첫 째는 서울 공대 토목과 출신으로 그 유명한 사우디 아라비아 쥬베일의

산업항 공사 입찰에 성공을 한 제일의 주역으로 75년 초에 토목 이사였는데, 당시 부사장 하던 분은 그 공사를 그 가격 (9억 4천만 불)에 따면 회사 전체를 위험하게 할뿐더러 그 공사의 수행 보증을 한 금융권까지 위태롭다고

주장 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게까지 된 경우였다.

그러나 회장은 리야드 까지 직접 출장을 가서 입찰 팀을 독려하면서 진두

지휘를 하였다. 회장이 직접 입찰에 참가 하기는 현대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고. 개찰 시에 최저 응찰이라는 발표를 듣고 나서 호텔로 돌아와

그 입찰 팀 각자에게 현금 500 불을 수고 격려금으로 최초의 외화 현금

포상을 하였었다.

현대가 우리나라의 재계 순위를 바꾸는 획기적인 공사였는데, 회장의 둘 째동생인 당시 사장은 나라까지 팔아 먹을 (무식한 형 때문에) 수 있는 과오라며 현대를 떠나 한라 그룹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였다.

둘 째는 서울 상대 출신으로 나와 같은 부서에 근무하였는데, 본인의 상당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형의 그림자에 가리어 한 동안은 진급에 부진하였기에, 건설을 떠나 전자로 옮기어 전무까지 하다가 카나다로 이민을 갔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어려웠던 학비 때문에 휴학을 하며 돈을 벌어 가면서 형 먼저 대학을 졸업을 하고 나서야 둘째가 졸업 하게 되었고, 셋 째는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해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에서 예편하여 현대에

입사 외자부에서 근무 오래도록 뉴져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첫째와 둘째의 내자들은 같은 국민학교 동기 동창으로 애들이 있으면 큰

엄마 작은 엄마로 호칭하고 없으면 “야 자”로 통하는 각별한 사이였는데,

문제는 첫째의 내자가 운전 면허를 따고 나서 포니 원을 애용하면서 생겼다.

78년도만 하여도 서울에서는 포니 원이라도 운전수가 따로 있었고 더구나 시내에서 여자 운전수를 만나기는 아주 드물었던 시기였지만, 영어에도 옛 적에 있었듯이, “Driving a car is not ill-famed.” (우리 고등학교 쩍에 영어 선생님도 긍정적으로 보충 설명꺼정 하였다) 대게 초보적에는 운전이 약간은 신명 나는 일 ?

그러던 어느 날 강남 강변 도로에서 주행 중에 이 분이 마주 오던 반대 차선의 군용 트럭을 들이 받으면서 이승을 하직하는 끔찍한 일이 생겼다. 사고 차량 바로 뒤를 쫓던 다른 포니의 운전자는 바로 현대의 직원이었고, 그의 말에 의하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어처구니 였다고 한다.

어쨋건 첫 째는 더욱 회사 일에 열중하여 아주 많은 토목 공사를 해외에서 수주하게 되어 부사장까지 승진을 하게 되는데, 혼자 된지 삼 년 후에 회장이 중신을 하면서 화가인 새 부인을 맞이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늦은 아들 하나를 두게 된다.

매우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겼었는데 첫째가 회사를 그만 두고 나서 사업을 벌렸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풍을 맞게 되어 장기 투병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불행이 닥치는데 부인이 이 양반을 어느 기도원에

맡겨버리는 상상도 못할 경우가 생기었다.

중풍 환자들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은 모든 사리의 판단 능력이 가동

되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어 기도원에서의 애처로운 생활을 하다가 전에 같이 일하였던 운전사와 연락이 닿아 어느 날 그 곳을 탈출에 성공

하여 그 부인과는 연락을 끊고 생이별을 하였다.

용케도 이 냥반이 자기 본래의 리듬을 찾는 가 하여 왕년에 다니던 뉴욕엘 휠 체어를 타고 유람 하던 중에 “아뿔싸” 교통 사고로 객지에서 타계하는

불운으로 이 세상과 하직을 하게 되었단다.

수능 시험 후에 테레비에서 극성 어멈 대 안 극성 어멈끼리 잘 났다고 우스며 지꺼리는 건 가관도 아니었다. 한국 어멈들의 극성을 지나친 대리 만족을 위한 복수심(?)을 비우지 않으면 앞으로 기십 년을 만 불 국민 소득 수준에서 헤메일 것으로 보인다.

2006년 11월 28일 0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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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