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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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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 컬럼'에 해당되는 글 49

  1. 2011.02.11 龍潭골 餘摘 - 7 (得 次孫子)1
  2. 2011.01.15 龍潭골 餘摘 - 6 (村者 下京記)
  3. 2011.01.11 용담골 餘摘 - 5
  4. 2010.12.31 용담골 餘摘 - 4
2011. 2. 11. 16:26 一石 컬럼

10 일 점심을 막 마친 즈음에 得 次孫子의 소식이 오자

한 동안 바쁘기 시작합니다. 곤 석이 고고성을 울린지

한 시간 반 후입니다.

부지런히 면도하고 내자와 함께 서울로 가서 첫 상면을

하려고 마음은 설레이고 급해집니다.

2 월 20 일경에 세상에 합류하려는 통상 일수에서 무언가

급했던지 아니면 빨리 식구들과 만나고 싶었는 가 봅니다.

작년에 용담골 役事를 시작할 때에 애들과 함께 현장에

들리려고 백운산 넘어 광덕산을 내려오니 하도 고불고불한

계곡을 약 이십여 분 차속에서 있다보니 며늘아이가 속이

시원치 않다는 말을 하였을 때에 손주 놈들이 좋아하니까

쉽게 넘어간 일이 있은 한참후 셋 째 아이가 자라고 있다길래

상금을 건 일이 있었읍니다.

아들이면 다섯 잎 딸이면 세 잎을 주겠노라 해 놓고서 아들

같다는 말이 없길래 지난 12 월에 우선 기본 세 잎을 건네

주었고 새 식구 생겨서 밖에 나가기가 얼마간은 어려울테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읍니다.

엊 그제 전화로 날자가 임박한 것 같이 보이는데 사주상으로

언제가 좋은 지를 물어 왔길래 아는 지식을 모아서 일러 주면서

그 당일 날은 아주 좋을 게 없는 날이니 넘겨야 한다고 강조

주었고 12 일 子時가 세상에 제일 좋은 時라 했읍니다.

그 말을 들은 내자는 9 일 亥時까지 잠을 못 이루었다 하였고

나는 둘 째 손자 놈 作名하느라 古 지식을 동원하여 소리의

음양 오행과 성명의 數理를 짜 맞추어 정리한 다음에 10일에

태어 날 것으로 짐작하여 결정을 해 놓고 평소에 여덟 점 취침이

아주 늦어졌더랬읍니다.

둘 째 손자를 만나러 서울 가기전에 남은 상금 두 잎을 인테넷

뱅킹으로 보내고 문자로 기별하고 곤 석의 이름을 좋은 종이에

먹 붓으로 써가지고 용담골을 벗어나 서울로 가던 중에 長孫女가

전화로 지가 또 누나가 되었다며 할아버지가 이름을 무얼로 지었는

지를 물어왔읍니다.

答은 상서로울 정

으뜸 민 이라 일러 주었읍니다.

용담골을 떠난지 두 시간만에 곤석을 상면하였읍니다.

첫 손자 녀석은 지가 형 되었다고 으시대며 인사하였읍니다.

태어나 네 시간만에 자면서도 안기어 슬쩍 미소를 띄우는 게

할배에게 인사하는 듯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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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11. 1. 15. 15:58 一石 컬럼
村者 下京記

龍潭골 촌에서 서울 벗들과 신년 회동을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11점 반 광화문을 약속 장소를 향하여 출발하려고 사창리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보니 엊 저녁부터 나리는 눈은 아직

뿌리고 있었읍니다.

광덕산 넘어 백운 계곡이 눈이 쌓였을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언짢어지기에 춘천 나가는 8 점 40분 고속버스를 택하여

가는데 춘천이 가까워지면서 눈발이 더욱 거세집니다.

버스 기사에게 전철 타려한다니까 눈이 지금 문제이니 터미널

남춘천에서 내리라는 조언입니다. 터미널에서 우산 하나를

서울보다 2천 원 더주고 사고서는 남춘천 전철역까지 약

600여 미터를 걸어서 다 가오는데 한 할머니 군밤을 구우며

눈을 맞고있었읍니다.

군밤은 저녁 퇴근 길에 사서 집으로 가져가는 맛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침 나절에 군밤 사는 맛을 갖고싶어서

2천 원어치 밤 열 톨을 사고 터미널에 올라가서 서울서 하던

버릇대로 공짜 표를 기계에서 받아 플랫 홈에서 시간표를

보니 마침10 점 2분 상봉동으로 출발하는 급행 열차였읍니다.

눈 맞으며 서울 가는 맛과 처음 타는 전철이 급행이라 - 상쾌한

기분이었읍니다. 한 시간만에 시골 전철에서 서울 도시철로

광화문까지 계속 거져 움직이는 게 약간은 미안도 하지만 고마운

생각에 월남 참전했던 게 그리고 해외에서 품 팔았던 게 잘 했던

젊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쬐끔은 들었읍니다.

오늘은 옛 말로 소학교 때 벗들과의 회동 - 매일 같이 메일로만

만나던 걸 얼마나 잘 늙어가고 있는 지를 보며 좋은 음식을 먹을

있는 즐거운 점심이 있는 날입니다. 모이면 늘 할배와 할매

두 팀으로 나뉩니다.

모이는 친구들이 누구인지는 메일이 1:1로만 보내지기에 늘 모이던

친구들이 모이겠거니 하지만 물어보아도 안 가르쳐 주어야 맛이 더

나는 경우가 오늘 같은 날입니다. 대충 다 모였을 때에 누군가 물어

봅니다. 누구 또 올 사람 있느냐고 - 누구하고 누구가 온다하니

다들 오랫만에 보게 될 친구라고 반겨합니다.

요즘 종로통에는 아주 큰 건물들이 많이 생겨서 서울 사는 친구들은

시골 村者보다 조금은 모르는 구석이 있기에 재미난 경우가 생기고는

합니다. 같은 건물 맞는 층에서 전화로 어디냐고 헤매며 묻는 때입니다.

어떤 친구는 종로통이라 했는데 안국역에서 어느 쪽이냐고도 합니다.

村者 상경하여 벗들과 증명사진을 찍었읍니다.

귀향 길에 다른 촌티나는 일이 생겼읍니다.

춘천가는 전철타려고 상봉동 역에 올라보니 춘천표지 붙은 전철이 마침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시간표는 아직 17분이나 남아있기에 맨 앞 칸

건너 편에서 열차 운전수가 보이는 곳에서

喫煙을 즐기고자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시간이 넉넉하여 한 대를 더

즐기고 있는데 전철은 미끄러지듯이 출발하여버리고 말았읍니다. 나만이

촌자가 아니라 그 기차도 촌자였읍니다. 서울에서는 전차가 떠나려면은

어김없이 "열차 출발 하겠읍니다." 하고나서 "출입문 닫겠읍니다."라는

연속 방송이 플랫폼에 울리게 되어있지만 시골 가는 차는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촌자를 놀리는듯이 떠나가고 말았읍니다. 열차 운전수의 심통

은 아니었으리라 믿고싶습니다.

내자와 상봉역에서 잠시 생이별을 하게된 것입니다. 다음 차는 한참 후에

가는 급행열차입니다. 상봉역 다음 급행 정거장은 "퇴계원"이기에 거기서

기달릴 것을 통지하려는데 내자도 村者여서인지 휴대전화 밧데리가 충전

이 모자라 불통입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통화를 시도하지만 역시나입니다.

내가 탈 차의 출발 시간 5분 전에 촌내자는 퇴계원 역 매점의 도움으로

연결이 되어 만나기로 되어 다행이었지만 할멈의 재빠른 잔소리는 아니

해보아도 비데오였읍니다.

드디어 남춘천역에 내혀 사창리 가는 버스는 40분 후에 출발이라니 바로

붙어있는 대형 마트에 들려서 몇 가지 짐을 늘리고 사창리에 돌아왔읍니다.

다행히 이틀 전에 구동륜 두개의 바퀴를 스노 타이어로 갈아끼운 보람이

있어 쉽게 용담골 내 따듯한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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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11. 1. 11. 07:56 一石 컬럼

우리 집 寒帶에서 사는 세 식구 이야기입니다.

복순이 나이는 4달 반, 복실이는 8달 반 복돌이는 아홉 달

복순이는 아직 아가이지만 남은 두 놈은 成犬이기에 복돌이는

따로 독립 가옥에서 살고있읍니다. 오늘 아침 용담골 기온이

영하 20도임에도 얘네들은 사람 눈에 추워만 보일 뿐 아주

꿋꿋합니다.

얼띠던 복순이는 이제 복실이 보다 서열이 위일 뿐아니라

체격이 두 배이상 월등히 크니 복실이가 꼬랑지 내린지

오래 되었읍니다. 복순이가 뭘 먹고 있을 때에 복실이는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고 부러운 눈치만 보입니다.

복순이 앞발은 복실이 것보다 세 배정도 크고 앞 발질의

명수이기에 복실이는 당할 수 밖에 없읍니다. 그래도

민첩하기로는 복실이가 아직까지는 한 수 위입니다.

추위에는 아랑곳 하지아니하고 주인 인기척만 느끼면 꼬랑지

흔들며 방향 제대로 잡고 쳐다봐주며 각자가 지 이름 불러주면

데 세게 꼬랑지 흔들어줍니다. 이름 기억하는 청각은 분명합니다.

옛날 국민학교 일 학년 국어 교과서 두 번째 쯤에 "우리 집 강아지"

라는 글이 있었고 그 강아지 이름은 복실 강아지로 기억합니다.

그 때의 추억으로 "복실"이가 이름 지어졌고 사내 놈은 "복돌"이가

되었지만 복실이는 복돌이의 짝이기에는 어울릴 수가 없읍니다.

한 번은 친구가 용담골에 들렸을 때에 강아지 이름을 대며 소개

하다가 복실이라는 이름이 자기 내자의 이름과 똑같다는 말을 들은

후 어느 날 그 친구 내외가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강아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낸 일이 있었읍니다.

문헌에 삽살개는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잘 견디어낸다고 합니다.

생김새로 말하면 삽살개는 자주 안보는 사람에게는 아주 못 생긴

정이 쉽게 잘 안가는 모냥을 하고있지만 예네들은 나름대로의

재롱과 귀여움이 있을 뿐더러 영리함에는 뛰어난 재주꾼입니다.

복실이는 털이 짧아서 외양도 작아서인지 추위를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욘석은 낮에 일광욕 할 때에도 복순이

에게 기대거나 벼개삼거나 상체를 얹어놓고 졸음에 망한을 즐깁니다.

뛰어난 청력을 가지고 있으나 자연의 소리나 자기 영역에 별 영향을

아니 주는 소리에는 그냥 즐기는 편이지만 다른 동물 고라니나 들

고양이의 출현에는 지날칠 경우가 없읍니다. 큰 놈이 짖어대면 곧이어

작은 애들의 이중창이 이어집니다. 자주 나타나는 산까치 떼나

떼까치 떼들은 몰려와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잘 놀다 가라는 듯

구경만 해줍니다. 택배가 오면 짖어대지만 우체부는 안다고 반깁니다.

주인이 먹을거리를 손에 쥐었거나 혹은 주머니에 넣고 다가가면 빨리

내놓으라고 세게 꼬리 흔들며 펄펄 뜁니다. 그걸 보여주며 "너 줄

아니다" 라하면 금새 포기할 줄도 압니다. 막상 주려하면 우선 앉아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다려줍니다. 앉아야 잘 얻어먹는다는 체험의

지식입니다.

욘석들이 용담골을 더욱 신명나게하는 우리 식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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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10. 12. 31. 11:18 一石 컬럼

1956년 1 월 하순 겨울 방학이 끝나고 중 1을 마무리하는

어느 날 아침에 혜화동 학교에 다달으니 교문에서 오늘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영하 18.6 도) 수업을 안한다는 통지를

받아 모두들, "야 (!) 신난다 (!) 수지다 (!) 수지 (!)"하고

집으로 가서 스케이트 어깨에 매고 보문동에서 창경원까지

물론 걸어가 얼음을 지친 일이 있었읍니다.

혜화동을 졸업하고 삽십여 년 후에 은사 한 분이 해주신 말씀이

당시에 혜화동에서 선생님을 하면 양키 부대에 낵타이 메고

월급쟁이 하던 사람만큼이나 우럴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잘 몰랐던 사실이 당시에 학교는 전국에서 제일 월사금이 비싼

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문교부 장관이 말려도 머리를 하이칼라로

길러도 되었고 "찌꾸" 바르는 걸 이뻐하던 학교였읍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난로가 있는 곳은 교무실과 교내 이발소 뿐으로

기억하고 있읍니다. 아마도 학생들이 추워서이기도 하였지만

연세드신 선생님들 감기가 무서운 합작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요즈음 이 곳 용담골의 추위도 만만치 않은 곳이지만 고마워해야

할 세 식구는 밖에서 퍼대기나 이불 없이도 매우 즐거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고마울 수 밖에 없읍니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도 영하 15도이지만 얘네들은 배떼기를 눈위에

깔고 주인 모습만 보이면 꼬랑지를 흔들어 반겨합니다. 먹을 거리를

아니 주어도 좋아합니다. 추위는 아랑곳하지 아니합니다.

전쟁나서 대구 피난살이 할때에 그 많은 초가 집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슬쩍 따 먹으며 학교에 다니던 추억의 고드름이 용담골

처마 밑에는 지붕에 쌓인 눈이 낮에 조금씩 녹으며 얼며떨어지다가

아주 많이 만들어져 달리고 있읍니다.

올 겨울에는 눈이 제법 많이 오고있읍니다. 한 때에는 눈을 지독히도

미워한 적이 있었읍니다. 맹호부대에서 병정 마치고 귀국하면 곧바로

제대하는 줄 알고 왔으나 그 웬수 같은 김일성과 김신조 일당 때문에

춘천 3보대를 거쳐 백두산 부대까지 팔려 가니까 MOS (주특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전투 경험병이라고 보병으로 방산 고개까지 떠밀려

갔더랬읍니다. 만 36 개월만에 제대한 군번이지요.

요즘 용담골 처럼 눈이 많이 오던 곳이었는데, 눈 오면 삽자루 들고

눈온 길을 지나는 군용 차량의 사고를 막기 위해서 산등성이의 언 땅을

캐어 길위에 흙뿌리는 작업을 해야만 하는 일과의 연속이었지만 눈은 하루

이틀 계속 내리니 식사 시간만 빼고는 힘들고 고달픈 겨울이 있었기에

아니면 팔자에 따라서 눈이 없는 아주 더운 나라에서 십 수년을 품팔고

다녔는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병정한 지 40여 년 지나고보니 강산만

변한 것이 아니라 군인들이 눈 치우는 것도 장비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원도에 있는 군인 막사도 4층 짜리 건물이고 예적 old timer만 어렵고

배고픈 시절이었는 것 같으나 그들을 보는 지금의 눈은 매우 흡족합니다.

귀촌 생활은 심심하지 않느냐, 뭐하고 지내느냐, 시장은 어떻게 보러 다니

느냐며 외국에 사는 할배들이 걱정을 해주고는 합니다.

입맛대로 먹고 싶은 건 인터넷 쇼핑 몰에서 서울 보다 싸고 용담골까지

택배로 배달해 주며 IT 세상에 심심할 새가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하루 세 끼니를 화악산의 겨울 동양화를 바라보며 할 수 있고 아침

저녁으로 젊은 군인들의 함성이 간간이 들리는 곳의 정취는 설명하는

것보다는 용담골에 왕임하시어 시청각 교육을 하시면 된다고 전갈합니다.

해뜬 날에는 태양열 온수로 옥수동 물에다가 온탕을 즐길 수 있고 물 값

하수 값 걱정하지 아니하고 즐기는 귀촌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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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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