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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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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1. 08:29 一石 컬럼

일 학년 일 반의 작은 반란

1958년 고등학교 일 학년 일 반의 여름 철 오전 마지막
수업 시간입니다.

수학을 가르치시는정 희진 선생 님께서는
그 시간의 선생 님 진도가 끝이 나야 “차려” 소리와 함께
“경례”를 받으시고 나가시는 어르신입니다.

선생 님께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시는 분으로
시간 끝나는 종 소리는 안 들리십니다.

좋게 해석하면 체중 줄이려 가야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실제로는 빨리 수업을 끝내주셔야 한창 나이인 우리들 중에는
그 당시 어휘로 벤또를 잽싸게 까 먹고 싶은 친구 들도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더 이상 선생 님 강의가 들리지도 않지만
배는 자꾸 고파 옵니다. 수학이 지루함을 더 해 줍니다.

선생 님은 평소 강의 하시는 토온이 한 옥타브가 높습니다.
아마도 연로하신 선생 님께서 더 배 고프신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안 끝나고 있습니다.

하이 칼라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친구들 중에는 이미 그 당시의 유명한 명화인 “종는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를 보고 난 후입니다.

제일 키 큰 친구들 중 앞에 앉아있는 “세 명”이서 작당을 합니다.
혼자서 열한 음절을 다 발성하기에는 아무도 용기가 없습니다.

드디어 세 명이서 반란을 시도합니다.
한 명이 한 음절씩 만 나누어서 발성합니다.

“종”, “은”, “누”, “구”, “를”, “위”, “하”, “여”, “울”, “리”, “나” !!!!!
반란은 끝 납니다.

다 끝 나가는 데, 세 명이서 순간 포착이 서툴렀습니다.
선생 님께서 노발 대발 하십니다.

“다 나와요 !!!” 고성은 두 옥타브쯤 올라갑니다.

세 명이 교단 앞으로 불려 나옵니다.
선생 님의 장기인 백묵 통의 뚜껑이 손 바닥을 대신합니다.

배고픔이 다 멀리 도망갑니다. 모두들 숨을 죽입니다.
젊으신 선생 님 수업 시간이었으면, (예를 들어 같은 수학의
심 경보 선생 님), 쉽게 목적 달성이 될 겁니다.

일 학년 일 반 우리 모두는 짧아진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기억하는 친구들은 아직 생생한 기억입니다.
한 친구는 미국 사람 되어 있고, 한 사람은 아주 훌륭한 기업가입니다.
키가 컷던 또 한 친구는 영면 중입니다.


2002년 05월 13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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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10. 2. 24. 11:42 一石 컬럼
아파트 값 유감

우리나라 아파트의 원조는 주공에서 시작한 마포였으나 75년에 시작한
압구정동의 현대 아파트는 현대 구암 사업소에서 재미를 본 “Sub-division
Project”에서 비롯 된 것이다.

제 삼 한강교가 준공되어서 다리를 건너자 마자 있었던 배 밭이 오리지널
동네였다. (정주영 회장 바로 아래 동생인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의 사저가
있었던 곳)

76년도에 현대가 짓기 시작하여 분양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서울 사람들은
아파트를 우습게 알던 시절이어서 현대의 사원이면 아무나 산다고 하면 10%
할인을 해 주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아파트를 높게 평가 하던 이들은 평사원의 이름을 빌려서도 여러 채를
산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나 같은 사람은 아파트 현장엘 가보니 시내 뻐스도
안 다니고 자가용을 가져야 생활이 되는 곳이라 웃어 넘겼었다.

(주: 아파트가 안 팔리니까 중개나 소개를 하여서라도 팔리게 하였으면 고과에
반영 하던 시절이었음)

77년 8월에 사우디 리야드 지점장 시절에 그 아파트 값이 분양가에 비해 매우
뛰었다는 소식이 있을 때, 회사는 중동에 근무하던 우수 사원에게는 10%의
할인율로 할당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신청하여 산 일이 있었다.

지금 “김성환”이가 사는 바로 옆 72동 408 호 35 평 형이었다. 년가 중에 서울
와서 현장엘 가보니 “최공탁”이가 건축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육 개월인가 할부로 납입한 가격이 일천십만 원으로 기억한다. 계약하고
월 불입금을 낼 때마다 서울 소식이 낸 돈의 곱빼기를 주니 팔란다.

그 해 12월에 입주 되는 곳이었기에 입주 할 때를 기대하여서 버티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 본사 근무하면 이사 가려고 작정을 하고, 집안 어르신에게 결제를
올렸다가 혼줄이 나버리고 말아서 포기하고 입주 시에 팔기로 하였다.

77 년 12 월 24일 크리스 마스 이브에 입주 열쇠를 받아 들고 내자는 어른의
말씀에 따라 복덕방에 매물 하겠다 하여 곱배기의 가격으로 매도하여, 내
생애의 제일 큰 돈을 벌었다고 너무나도 흐뭇한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을 편지로 읽고서 정말로 감동한 게 사실이다. 사우디 삼년 반 근무에
생활비 빼고 모은 돈이 일천 팔백만 원이었는데 약 반 년 사이에 그 큰 돈을
벌었으니까 였다.

78년 9월에 귀국하여 본사 근무를 시작 하였을 때는 내가 판 가격의 네 배가
되어 있었다.

엊 저녁 뉴스로는 한 평도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집이 되어있다. “새옹지마” !



2002년 08월 28일 20시 18분
posted by 조 쿠먼
2010. 1. 25. 18:46 一石 컬럼

북한 처녀들과의 만남

2002-05-26



북한 처녀들과의 만남

수도 트리폴리에서 벵가지로 가는 공항 안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사십 여 명이 넘는 북한의 여자 동포를 보았는데, 탑승권이 내 것과 동일한 색갈이었다.

어느 해인가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 공항에서 소련항공의 여 승무원들을 만났을 때 보다 약간은 더 긴장되고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터미널 밖에는 “조선민항”기 한 대가 있었다.

참고로 여러 아랍권의 국내 항공 탑승권은 문맹자를 위하여 색으로 구분된다. 서너 명의 건장한 북한 남자들이 경호를 하고 있었으며, 아주 말 잘 듣는 국민학생 들처럼 매우 조용하였다.

우선 공중전화로 벵가지 지점으로 전화를 하여 도착 시간과 함께 몇 명이서 마중 나와 줄 것을 당부하였고, 곧장 탑승구 맨 앞에 가서 첫 번째로 줄을 섰다. 혹 잘하면 북한 여자와 동석이라도 했으면 하는 기대이어서 였다.

“남남북녀”라고 누가 하였던 가를 실감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얼굴에 크림 정도만 바른 그리고 눈썹 그린이 없는 아주 곱고 어여쁜 처녀 들로 보였고, 워낙 이쁜이의 진정한 모습은 화장 없는 주물러 터뜨린 데 없는 진짜 “북녀’ 들이었고, 이들은 벵가지 외곽의 조그마한 도시의 병원에 근무하게 될 의료진이었다.

탑승시간이 되니까, 건장한 북한 공관원 들이 이들 의료진들을 제일 먼저 리비아 공항 직원과 같이 안내하여 제일 먼저 탑승을 시키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참고로 사회주의 국가의 여객기는 별도로 지정 좌석권을 발행하지 않고 먼저 타는 사람이 먼저 앉는 자리가 임자이고 일등석이라는 제도가 없다.

내가 일류샨 여객기에 올라서 혹이나 기대했던 북한 처녀 혼자 앉은 자리는 없었고, 용하게도 그들로만 맨 앞에서부터 빈틈없이 꽉 찬 것을 보니 옆 자리에 앉아서 한 시간 여 비행 시간에 이야기 하고싶었던 꿈은 없어졌으니, 그들 뒷 자리라도 다행이라 싶어 정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비행시간 내내 철저한 교육 탓인지 벙어리 행세를 하였다. 처다도 안 보았다. 우리 말로 아무리 말을 걸어도 “쇠귀에 경 읽는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공항에 도착하니까, 역시 북한 남자들 여럿이서 나와서 그들을 안내하더니 그 많던 미녀 아가씨들이 금새 보이질 않아서, 우리 직원에게 찾아보라고 하였다.

공항 터미널 밖에 외진 곳에 짐차 (카고 트럭 2. 3톤 정도)가 두 대가 있었고 그들은 그 짐차 두 대위에 순한 양처럼 탑승하고 있었단다.

해외로 취업 나온 사람들이니 그 들의 여행 가방이 궁금하여 더 지켜보았더니, 웬 조그마한 우리의 라면 박스만한 것들을 북한 남자들이 정리하며 큰 카트로 가지고 나가고 있었는데,

그 박스마다에는 “평양 - 모스코바 - 벵가지로” 라고 쓰여 있었고, 그 밑에는 각자의 이름들이 보였다. 맨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웬 이렇게 많은 문구류를 가지고 들어오는가 하고 짐작하였으나 똑 같은 필체로 똑 같은 여행 경로와 개개인의 이름이 씌어 있는 걸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두어 시간 넘게 기대도 사라졌지만, 긴장 또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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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9. 12. 3. 13:42 一石 컬럼


알파벹의 순서가 아니다.
“B” 와 “D”는 한번 밖에 없는데, “C”란 놈은 수없이 많다.
“B” 는 Birth 이고 “D” 는 Death 이며, “C”는 Choice 를 줄인 말이다.

“B” 와 “D” 는 숙명적이기에 연습을 할 수가 없지만, “C”는 사람에
따라서는 가끔씩 연습의 기회가 있다. 그 연습도 너무 길게 하면
다른 “C”로 가기에 늦어져 헤어나지 못하는 게 십상이다.

우리가 보성 51회로 다 같이 만났던 것은 자의든 타의든 “C”에 속한다.
지금 와서 보성51이라는 “C” 를 탓하기에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 “C” 중에는 여러 개 중에서 제일 좋아보이는 놈을 선택하게 될 때에는
기분이 좋은 편이나 결과는 꼭 좋아지겠지라는 막연함이 실패로 되는

수가 있다.

잘될 줄 알았던 “C”가 실패로 끝난 경우를 하나 글로 옮기고자 한다.

때는 74 년 4 월 사우디 아라비아로 근무하러 가기 바로 전이다.

월급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 가로 궁리와 고민을 하다가,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 금리보다 더 커지는 것이 “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대단히

흡족해 하며 결정을 하고 나니 너무 잘한 방법이라고 자찬을 한 일이 있다.

애 둘하고 생활하고 남는 것은 무조건 “金”을 사기로 하고, 서방 기다리는

게 지루해 질가 봐 일주일에 주택복권을 열장 씩 사는 것 하고를 일년간

내자의 일로 하고 임지로 떠났다.

첫 달에는 한 냥짜리 금 열쇄를 사 놓고, 두 번째 달에는 금은방의 조언으로

괘로 사기 시작을 했다. 내자는 일주일을 주말마다 테레비 앞에서 복권 맟

추어 보는 게 서방 편지 받는 것 만큼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을 것이다.

이 “C”의 선택은 완전히 빗나가게 되었다. 75년에 귀국 휴가차 집에 왔을

때에는 제법 저축 분이 얼추 조그마한 집 하나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 “金”을 처분하게 되는데, 월남이 한참 전쟁하던 때에, 다시 말하여 금

값이 비쌀 때에 “金”을 사기 시작하여, 내가 정작 키워서 난생 처음으로 재산

목록 1호를 마련하려 하니까, 월남 전쟁이 끝이 나서 금 값이 폭락을 하여

안정된 것이다.

어른 밑에서 칠년이나 시집살이 시키고 겨우 오막살이 하나 사려는데, 전혀

도움은 커녕, 그 동안 기대 기대하며 샀었던 주택복권 마저 오백원 자리 이상

걸린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주택복권이라는 “C’는 그런대로 견디는 게 쉬웠으나, “金”이라는 “C”는 그 후
한 이년이나 괘심 하기 짝이 없었다.

이년 후에 그 집을 산 값에 세배 반이나 더 받고 팔았을 때에 겨우 “金”을 잊을

수 있었다.

“C”는 단기적으로 好, 不好를 판단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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