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Tag

'一石 컬럼'에 해당되는 글 49

  1. 2008.07.05 꼬맹이의 만 원
  2. 2008.06.05 어떤 년 (?)
  3. 2008.03.18 ‘ 四柱 八字 · 九 ’
  4. 2008.02.26 ‘ 四柱 八字 · 八 ’
2008. 7. 5. 05:03 一石 컬럼

꼬맹이의 만 원

한 달 전 초등학교 2 학년 짜리 손녀가 집에 왔을 때 만 원이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어디에서 났느냐 물으니 지 꺼란다.

며느리의 해설인 즉, 지 이종 사촌 언니 옷을 물려 받아서 입었는데

그 옷 주머니에서 나왔단다. 지 딴에는 수지가 맞은 것이다.

만 원이 곤 석을 제법 의기양양하게 하였다.

사촌 언니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니까, 언니는 모르고 있으니까

괜찮다는 주장이다. 며느리의 또 다른 해설인 즉, 곤석이 아직

지 손으로 구멍 가게에 가서 뭐라도 사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가지고 있는 것 뿐이라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충분히 지 입맛에 당기는 걸 사 먹을 수

있을 터인데, 어미가 너무 과잉 보호를 하여 온 것임에 틀림 없다.

과잉보호의 변은 불량 식품을 학교 근처에서 사먹는 걸 막기

위한 단호한 수단인 듯 하였다.

지금까지 설에 받아온 세배 돈은 모두 학교에서 하는 저금

통장에 넣어 두었단다. 그러니 돈에 대한 소유 개념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인데,

지 손에 있는 만 원은 지가 용기를 내어 구멍 가게에서 불량

식품이라도 그 것은 엄마의 개념이지 지 딴에는 아주 맛이

있는 걸 사 먹는 모험 내지는 탐험을 하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에 찾아 왔을 때에 아직 만 원을 가지고

있는냐는 내 질문에 다 사먹었단다. 드디어 구멍 가게에서

사 먹는 쾌감을 맛 본 모양이다.

며느리는 지한테 보고도 없이 이틀 만에 다 써버렸다고 분해

하는 눈치이고 꼬맹이는 지 친구들에게 딴에 맛있는 걸로 食

하였단다.

나는 손녀에게 잘 했다며 이만 원을 주었다. 너무 신명 나 했다.

그리고는 뭐 사먹고 싶으냐니까 아이스 케익을 사먹고 싶다

길래, 얼른 곤 석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서 무슨 아이스 케익을

먹고 싶냐니까 베스킨 라빈스라며 그 집을 가리켰다.

베스킨 라빈스 가게에 들어 가보니 전부 아이스 크림 뿐이고

아이스 케익은 없기에 데리고 나와서 빠리 빠켓으로 가 보니

근 열 가지나 되는 많은 종류의 아이스 케익이 있었다.

골라 보라니까 이 건 아빠가 좋아 하는 커피 아이스 케익,

이건 엄마가 좋아 하는 메론 아이스 케익 등등 지 집 식구들이

평소에 잘 사먹는 모양으로 신나게 골랐다.

한 보따리를 집어서 계산대에 가니까 전부 칠천 발백 원이라

길래 만 원 주면 얼마를 거슬러 받아야 하니까 모른단다.

그래서 나는 만 원에서 칠천 원을 빼면 얼마냐니까 삼천 원이란다.

다시 천원에서 팔백 원을 빼면 얼마냐 하니 이 백원 남는단다.

그래서 할아버지 식으로 계산하면 될 걸 왜 처음부터 모른다

하였느냐니까 다음 부터는 그리 셈을 하겠다 하였다.

욘석이 며칠 전에 전화를 하여 왔다.

할아버지 제가요 내일 국어하고 산수 시험을 보는데요,

다 백점 받으면 만원 주실 수 있어요

나는 쾌히 그러마 하였다.

질문은 또 나왔다. 근데요 하나만 백 점이면 오천 원

주실 수 있어요

나는 다시 수정 답변을 주었다.

둘 다 백 점이면 이만 원을 주고 하나만 백 점이면 이라고.

곤석은 즈이 엄마에게 이만 원을 다 번양 전화 중에 전달

하였다. 아주 흐뭇한 모양이다.

어제 나는 궁금하여 전화 하여 할아버지가 이만 원 줘야 하는

지를 물으니 아직 시험지를 아니 받아서 지금은 말 할 수가 없단다.

지가 본 시험을 어찌 다 맞았는지를 모르느냐고 물으니, 지는 다

맞는 걸로 썼지만 선생님이 틀렸다 하면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곤석의 답이었다.

아마 이만 원을 받을 양 치면 지가 내게 전화를 하여 올 것이고 아니면

전화를 안 할 것일가 궁금해 하고 있다.

'一石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신과의 대화  (0) 2009.10.06
47 년만의 변고  (0) 2008.12.21
어떤 년 (?)  (0) 2008.06.05
‘ 四柱 八字 · 九 ’  (0) 2008.03.18
‘ 四柱 八字 · 八 ’  (0) 2008.02.26
posted by 조 쿠먼
2008. 6. 5. 11:24 一石 컬럼



어떤 년 (?)

햇수로 40년 째 내 옆에서 한 이불 쓰고 살아 온 내자가 느닷없이

어떤 년이 준거야 (!) 질문이기에는 감정 섞인 말투가 지 혼자서

씩씩대는게 자못 심상찮은 분위기를 나는 즐기고 있었다.

? 내가 아주 젊어서 이뻐하던 이 준거야 (!)

나의 답 또한 이실직고하면서 그 다음을 기다리는데 무응답이었다.

결혼 반지를 나는 별로 끼고 다닌 적이 신혼 초에 잠시 말고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입사원 되고서 백일이 안되어 혼례를 올렸는데 같은 부서에 왕 고참들이

총각들이어서 눈치 보이는 것 같아서 가 그 이유로 들고 싶다.

그리고 흘러흘러 몇 해전에 내 반지를 내 놓으라니 고이 숨어 있었던 걸

꺼내어 주기에 내가 늘 기억하는 데에 두었다가 며칠 전에 끼었던 건데

그 것도 내자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고 조금은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뒷 쪽을 손등 위로 보이게 끼운 것이 탈이 된 거다.

나는 계속 내자의 분함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반응도 없이 일말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맞먹어 오던 버릇이 무얼로 되돌려

주느냐의 고심으로 차 있는듯 보였다.

그냥 두었다. 시간이 약이려니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이상하게도 튀어 나왔던 주둥이가 쏘옥 들어가 있었다. 약을

올리려고, 내가 좋아 했던 집에 데려 올테니 밥 한 끼 대접 해 주겠느냐

물으니, 씨익 웃는다.

잘 적에 확인을 한 모양이다. 치매의 초기 증상이 아니길 바란다.

'一石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년만의 변고  (0) 2008.12.21
꼬맹이의 만 원  (0) 2008.07.05
‘ 四柱 八字 · 九 ’  (0) 2008.03.18
‘ 四柱 八字 · 八 ’  (0) 2008.02.26
“一石” 의 由來  (0) 2008.02.24
posted by 조 쿠먼
2008. 3. 18. 17:49 一石 컬럼

사람은 모두가 부모로 부터 지능을 물려 받는다. 하지만 팔자는 물려 받을

수가 없다고 본다. 5, 60년대의 중고등 학교 입학은 성적에 따라서 명문

학교가 정해져 있었다.

명문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가 명석한 머리와 출중한 학업으로 모교를

빛내 주었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게는 좋은 명문 대학교엘 진학하였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 하면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끝까지 공부에 전념하는

들은 학자나 연구원 쪽으로 풀리지만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생활로

뛰어들 때에는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그나마 평생을 사업이라는 것도

해보고 근로 소득세 조차 내보고도 먹고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가난에 쩔어 사는 이도 있다. 학교 공부하고는 전혀 남이다.

6, 70년대에는 공개 채용을 하여 입사 있는 직장이 손가락보다도

적었기에 실력이 우선이었고 아니면 이라는 거에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

거의 같은 실력으로 같은 직장에 입사 동기이면서도 빠른 친구가 부장이 되는

데에도 과장에서 헤메이는 친구도 있다.

명문 출신들이 더러 헤메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친구들은 실력 발휘할

생각은 아니하고 왕년에 이류 삼류에 지나지 않았던 실력을 비하하기 일수고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회사에 대한 기여도나

생산성에 떨어지는 데에도 혼자서 인정을 하지 않고 버티게 되다 보면

중간에 도태 되기 마련이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어렸을 경우를 보면 야간 상고 나오고 고대에 들어

와서도 모진 젊어서의 역경은 거의 거친 셈인데, 현대에서 인정 받은 탁월한

실력과 능력이 현대 그룹이 너무 좁아 보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서울 시장 시절의 업적은 역대 시장 중에서도 가장 출중하였다고 판단이 되는데,

실력이 좋은 행정가이기 전에 무언가 훌륭한 일을 찾아서 만인이 좋아하는

내어서 얻어지는 기쁨을 낙으로 삼는 심성과 팔자인 게다.

그의 형인 국회 부의장은 서울 상대 출신으로 학교 시절에 실력은 출중하다

하겠지만 당에서의 경력은 별로 없었던 경우이어도 도전한 결과는 끝까지

많은 모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필승을 이루어 쾌거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민학교 여자 동창 하나는 어려서 부터 미모면 미모 실력이면 실력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모두들 부러워하는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곧바로 어느 부자집

며느리로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줄줄이 딸만 넷을 두었으니 마음

고생이 어느 만큼이었는 지를 그의 실토로 알게 되었다.

딸이 시집가서 번에 손주 아들을 낳았다는 데에도 믿기지 않아서 신생아의

고추를 자기 눈으로 확인 하고서야 믿게 되었는데, 자리에서 할미는 엉엉

울었다고 하였고 그의 가족사에 아들에 대한 행복감이 시작되 었다고 하였다.

요즈음에는 재수 삼수생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는데 가까운 친구중에 하나는

오수생(五修生) 있다. 번째 마누라는 하나를 두고 사별을 하게되어 재수생이

되었는데 번째는 서방 모르게 문서 잡히고 도박하다가 감옥소에 가는

바람에 삼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삼수의 길은 미국에 가서 불법 체류자가 되는 바람에 모진 고생을

하다가 만난 한국 태생의 시민권자 쉽게 이민법은 해결이 되었으나

미국인과의 가정 생활은 순종 한국 여인과는 아주 달랐고 서로 속았다며

四修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쩌다가 것이 습관성이 붙으니까 (?) 오수생의

지경에 까지 있는데 나름대로의 행복은 있는듯 하여 안심이다.

옛 왕실에서 임금이 중전의 침전에 드는 날을 가려주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一石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맹이의 만 원  (0) 2008.07.05
어떤 년 (?)  (0) 2008.06.05
‘ 四柱 八字 · 八 ’  (0) 2008.02.26
“一石” 의 由來  (0) 2008.02.24
故 高繼聖 선생 님을 기리며  (0) 2008.02.22
posted by 조 쿠먼
2008. 2. 26. 11:26 一石 컬럼

아들 사 형제가 모두 현대에서 생활을 한 가족이 있었다.
넷 모두가 대단한 실력을 가지었기에 커다란 몫을 하였었다.

첫 째는 서울 공대 토목과 출신으로 그 유명한 사우디 아라비아 쥬베일의

산업항 공사 입찰에 성공을 한 제일의 주역으로 75년 초에 토목 이사였는데, 당시 부사장 하던 분은 그 공사를 그 가격 (9억 4천만 불)에 따면 회사 전체를 위험하게 할뿐더러 그 공사의 수행 보증을 한 금융권까지 위태롭다고

주장 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게까지 된 경우였다.

그러나 회장은 리야드 까지 직접 출장을 가서 입찰 팀을 독려하면서 진두

지휘를 하였다. 회장이 직접 입찰에 참가 하기는 현대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고. 개찰 시에 최저 응찰이라는 발표를 듣고 나서 호텔로 돌아와

그 입찰 팀 각자에게 현금 500 불을 수고 격려금으로 최초의 외화 현금

포상을 하였었다.

현대가 우리나라의 재계 순위를 바꾸는 획기적인 공사였는데, 회장의 둘 째동생인 당시 사장은 나라까지 팔아 먹을 (무식한 형 때문에) 수 있는 과오라며 현대를 떠나 한라 그룹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였다.

둘 째는 서울 상대 출신으로 나와 같은 부서에 근무하였는데, 본인의 상당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형의 그림자에 가리어 한 동안은 진급에 부진하였기에, 건설을 떠나 전자로 옮기어 전무까지 하다가 카나다로 이민을 갔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어려웠던 학비 때문에 휴학을 하며 돈을 벌어 가면서 형 먼저 대학을 졸업을 하고 나서야 둘째가 졸업 하게 되었고, 셋 째는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해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에서 예편하여 현대에

입사 외자부에서 근무 오래도록 뉴져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첫째와 둘째의 내자들은 같은 국민학교 동기 동창으로 애들이 있으면 큰

엄마 작은 엄마로 호칭하고 없으면 “야 자”로 통하는 각별한 사이였는데,

문제는 첫째의 내자가 운전 면허를 따고 나서 포니 원을 애용하면서 생겼다.

78년도만 하여도 서울에서는 포니 원이라도 운전수가 따로 있었고 더구나 시내에서 여자 운전수를 만나기는 아주 드물었던 시기였지만, 영어에도 옛 적에 있었듯이, “Driving a car is not ill-famed.” (우리 고등학교 쩍에 영어 선생님도 긍정적으로 보충 설명꺼정 하였다) 대게 초보적에는 운전이 약간은 신명 나는 일 ?

그러던 어느 날 강남 강변 도로에서 주행 중에 이 분이 마주 오던 반대 차선의 군용 트럭을 들이 받으면서 이승을 하직하는 끔찍한 일이 생겼다. 사고 차량 바로 뒤를 쫓던 다른 포니의 운전자는 바로 현대의 직원이었고, 그의 말에 의하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어처구니 였다고 한다.

어쨋건 첫 째는 더욱 회사 일에 열중하여 아주 많은 토목 공사를 해외에서 수주하게 되어 부사장까지 승진을 하게 되는데, 혼자 된지 삼 년 후에 회장이 중신을 하면서 화가인 새 부인을 맞이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늦은 아들 하나를 두게 된다.

매우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겼었는데 첫째가 회사를 그만 두고 나서 사업을 벌렸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풍을 맞게 되어 장기 투병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불행이 닥치는데 부인이 이 양반을 어느 기도원에

맡겨버리는 상상도 못할 경우가 생기었다.

중풍 환자들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은 모든 사리의 판단 능력이 가동

되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어 기도원에서의 애처로운 생활을 하다가 전에 같이 일하였던 운전사와 연락이 닿아 어느 날 그 곳을 탈출에 성공

하여 그 부인과는 연락을 끊고 생이별을 하였다.

용케도 이 냥반이 자기 본래의 리듬을 찾는 가 하여 왕년에 다니던 뉴욕엘 휠 체어를 타고 유람 하던 중에 “아뿔싸” 교통 사고로 객지에서 타계하는

불운으로 이 세상과 하직을 하게 되었단다.

수능 시험 후에 테레비에서 극성 어멈 대 안 극성 어멈끼리 잘 났다고 우스며 지꺼리는 건 가관도 아니었다. 한국 어멈들의 극성을 지나친 대리 만족을 위한 복수심(?)을 비우지 않으면 앞으로 기십 년을 만 불 국민 소득 수준에서 헤메일 것으로 보인다.

2006년 11월 28일 09시 27분

'一石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년 (?)  (0) 2008.06.05
‘ 四柱 八字 · 九 ’  (0) 2008.03.18
“一石” 의 由來  (0) 2008.02.24
故 高繼聖 선생 님을 기리며  (0) 2008.02.22
“막내야”  (0) 2008.02.20
posted by 조 쿠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