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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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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 컬럼'에 해당되는 글 49

  1. 2008.02.24 “一石” 의 由來
  2. 2008.02.22 故 高繼聖 선생 님을 기리며
  3. 2008.02.20 “막내야”
  4. 2008.02.19 ‘ 四柱 八字 · 七 ’
2008. 2. 24. 05:16 一石 컬럼

一石 由來

88년에 6 개월 동안 大山 金碩鎭· 翁께서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周易

강의를 들어 아주 쬐끔을 배웠다. 같이 동문 수학 하던 이로는 서영훈 당시

흥사단 이사장도 있었다.

대산 김석진(大山 金碩鎭·74) 선생께서는 우리나라 주역의 제일 가는 대가로서

대전에서 한약방을 하시면서 후학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매주 번씩

서울 동숭동에 오셔서 강의 대가 없이 열강을 하시었다.

계절에 관계없이 두루마기의 정장으로 하나 하나를 옛날 정희진 선생님

처럼 읊으는 것부터 따라 읽게 하고 예를 들어가며 해석 하여 주시고 따라

읽게 하고 조선조 시절의 한학당 같은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학점

얻으려 마지 못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뭔가 배우고 싶은 욕심으로 한동안 배운

일이 있었다.

달쯤 되어 강의 끝나고 나서 선생님에게 다가 가서 號를 갖고 싶다고 간청을

드리니 쾌히 승락을 하시며 성명과 사주를 달라 하시기에 그리하고 나서 다음

, 강의를 끝내시더니 나를 불러 한문 글씨로 길게 쓰신 것을 보여 주시며

가지를 물으시더니 선생님께서 짐작 바와 같다며 옳게 作號 되었다며 내게

주신 것이 一石이었다. 답례는 6 인삼 다섯 근으로 대신하였다.

하시며 號는 자주 불려져야 吉하다 가르침을 주셨는데 한동안 쑥스러워서 누구

에게 號가 있으니 불러달라 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92년에 14 동안 살던 집을 없애고 신축을 하게 되었는데 屋號를 자필로

써서 돌에 새겨 붙여 놓으면 남들이 불러 주어도 절로 읽고는 다니리라는

생각에 작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一石 다음에 무슨 字를 옮겨 놓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어

달을 넘게 궁리를 하며 자문을 받게 되었는데 빌딩 號가 한문인데

어울리고, 樓를 넣으면 중국집 내음이 나고 屋을 붙이면 막걸리 음식점이

연상 되고 廳도 안되고 혼자만의 번민을 하고 있는데,

최학래가 , 좋기는 마루 자가 좋겠으나 같은 서민이 건방지니까

쓰지 말라고 욱박 지르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지나쳤는데, 듣고 보니 좋은

자를 두고 사견으로 건방지다는 어떠냐 하는 생각과 그럼 혼자만

건방지다 할지도 모르니 쓰기로 하였다.

막상 屋號를 결정하고 나서 배우지 못한 글씨로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열흘이 넘도록 보아도 실력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서예쟁이에게

주고 대신 달라하여 볼가를 생각 하던 어느 저녁에 반주 삼배를 하고

나서 딸따름 취중에 글씨 배운 애타하며 번에 쓰고 나니

기운에 입어 그럴듯 하게 보여 그대로 결정하고 말았다.

그냥 건축 시공쟁이에게 주어 달라하여 붙여 놓은 이제 12년을

넘었는데 아직 옥호가 건방지다는 말은 들어 보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2004 01 26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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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8. 2. 22. 07:20 一石 컬럼

故 高繼聖 선생 님을 기리며

2003년 02월 06일 21시 57분

나는 학교 6 년을 다니며 특별히 어느 선생 님과 각별한 관계라면 이상하지만 밀접한 인연을 맺어 본 선생님이 이번에 속세와 別離 하신 高 선생 님이었다. 학교 때 내 체육 성적은 그 냥 턱걸이 80점 정도 그것도 그냥 봐주어서 였다는 감을 가지고 있다. ‘61년 대학교를 떨어저 재수를 해야 할 형편이었는데 집안 형편이 먹고 
사는 문제가 원만하지 못한 때여서, 어느 봄날에 혜화동 1 번지엘 갔다가, 운동장에서 高 선생 님을 만나 뵈었는데, 늘 그러 하셨듯이 인자하시고 편안 하시게 인사를 받아 주시어, 쉽게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 드렸었다. 낙제를 면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 삼짜리 녀석이었는데, 학교 간다고 나가서 정릉이나 남산에 가서 몇 녀석들이 점심을 먹고 하는 문제를 가진 애였다. 그래서 高 선생님 덕에 쥐꼬리만 하지만 얼마간의 사정이 덜 걱정스러웠었다. 세월은 흘러 흘러 ’78 년 8 월쯤 하여 高 선생님께서 용케도 내 전화 번호를 아시고 전화를 주셨는데, “야 ! 불고기 사줄게 저녁에 나와라 !” 하셨다. 당시는 故 정주영 영감 옆에서 일하던 때여서, 선생 님께 회사 근처로 와 주실 것을 청하여 만나 뵈었더니, 내용인 즉, 큰 아들이 전기과를 졸업하고 병정갔다 와서 현대에 입사 시험을 보게 되었으니 책임 지라는 말씀이었는데, 내 답은 “현대에는 성적이 꼬망지라도 되어야 면접에서 건질 수 있다고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낙심에 가까운 표정과 일루의 희망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입사 시험은 그룹 차원에서 공채를 실시하는 거였고, 건설이 모 회사였기에 시험 성적을 알 수 있었는데, 정말 꼬망지로 필기 시험에 합격을 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필수 과목인 영어 시험 출제를 책임지고 있었고, 문제는 다섯 개 대학의 영문과 주임 교수들에게 출제료를 주고 문제를 받아 한 시간에 풀수 있는 양 만큼 짜집기를 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고대의 故 조운제 교수 님께도 의뢰를 하곤 했었다.) 나는 高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만나서 실 사정을 말씀 드렸는데, 일단 그룹차원 에서 입사시험은 합격은 면접점수로 확실하게 하겠으나, 모 회사인 건설에는 안 되겠고 계열사에 전기쟁이로 할 수 밖에 없음을 말씀 드린 일이 있었고, 그 후에 인천제철에 입사하여 아직까지 잘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십 수년전 高 선생 님 칠순 잔치에도 찾어 뵈었고, 나 한테 젊은 놈이 돋보기 쓴고 신문 본다고 야단 치곤 하셨는데, 두어 달 전에 선생님께서 뇌에 스트로크를 맞아 누워계신다는 귀동냥을 했었는데…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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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8. 2. 20. 10:39 一石 컬럼

“막내야” 2006년 05월 25일 05시 31분

너는 나하고 띠 동갑네로 태어났다. 우연하게도 큰 애는 할아버지와 띠 동갑이고, 둘 째는

할머니와 띠 동갑 - 우리집에 넷 째가 태어났었다면 걔는 틀림없이 네 엄마와 띠 동갑

이었을 걸로 믿어진단다.

하지만 네 엄마의 부정적인 주장으로 넷 째는 생각도 못했고 너 마저 어려운 설득 끝에

태어 난 게 네 작은 형이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구나.

어쨋던 너는 태어나면서 부터 아직까지 같은 地番에서 학교를 시작하였고 병정 다녀왔고,

올 9월이면 졸업을 하는구나. 대학교 갈적에 너는 뻐스나 전철 한번 못 타보고 동네에서만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하다고 불평을 하였었지만 그게 아마 네 四柱인가 보다.

네가 공부를 썩 잘했더라면 신림동 쪽으로 등하교도 할 수 있었겠지만 네 실력이 그만

밖에 못한 게 바로 네 탓이지 아비 탓은 아니라는 걸 지금 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대학교라는 게 입학하여 졸업하기 까지 가 으시댈 수 있는 시기이지 사회생활 시작하면은

아무 생관 없이 네 길은 네가 개척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는 거라는 걸 이제는 곧 알게

되리라 본다.

6 월 7 일부터 LG 전자에 신입사원 생활의 시작이라니 아침부터 전철 타고 다시 한번 갈아

타고 러시 아우어에 출퇴근하게 되면은 사회생활 시작 전까지 한 동네에서 맴 돌았다는

것이 어쩌면 안 보였던 福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모든 게 시작이구나. 좋은 대학 출신이라고 기업이 모두 채용하지 않는 다는 걸 네가

알았겠구나. 신입사원끼리는 평준화 된 상태에서 경쟁이 시작 되는 거란다. 누가 더 잘

적응하고 회사에 기여를 많이 하느냐가 경영진에서 보는 잣대란다.

내가 회사생활 시작 할 째 월급이 짜장면 천 그릇 사 먹을 수 있는 값어치 였는데 너 또한

그 수준이라니 월급은 대체적으로 자장면 값과 비례하는 듯 하구나. 평소에 군것질 좋아

하더니 이제는 싫것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네게 주문이 있단다.

내가 지금 네 나이에는 장가들어서 네 형이 한 살이었단다. 나는 회사생활 시작하기 전에

네 엄마와 데이트를 하였었는데, 너는 도대체가 학교 다니면서 기지배한테서 전화가 온

일이 없다는구나.

글쎄다 잘 한 건 지는 아직 판단하기가 이르겠지만 이제는 서서히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네가 내 형편에 있어도 같은 소망일 게다. 기지배는 아주 이쁘면 (미인박명) 피하는 게

현명하다고 주장한다.

건강하고 사리에 밝고 착하고 사회생활에 마누라하고 같이 다니면서 못났다는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합격점을 주거라. 아이큐는 135를 기준으로해라. 얼굴에 칼질 한 아이는

불합격 시켜라. 그러나 회사 내에서는 고르지 마라. 딱 무엇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 기준이 그

렇다는 것이다.

제 나이에 장가들어서 너한테 손해나는 일은 결코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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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쿠먼
2008. 2. 19. 10:54 一石 컬럼

우리는 자라 오면서 많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 오고있다. 일반적으로 그 동안의

과정에서 제일 행복했던 점을 꼽으라면 대게는 결혼한 사실이 으뜸일 것으로 짐작

되는데, 결혼하면서 내외간에는 자식을 몇이나 가질 것인가가 큰 희망 거리였다고 본다.

그런데 자식을 갖게 된다는 사실 자체만 가지고도 희망에 벅찬 꿈이었지만 아들 또는

딸을 기대하여서 기대치 만큼 딱 들어 맞는 집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어 왔기에 八字論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리 51회에는 딸 셋 가진 친구들이 제법 있는 편이고 딸 부자 집은 넷을 둔 친구도 있으니

현실은 의지와는 별개로 펼쳐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딸들과 사위들이 효를 행하니

지금은 행복하다 강조 하더라도 갓난쟁이 시절에 네 번째 딸이 태어 났을 시점에서는 그

또한 좋다고 박수를 쳤을 가는 본인에게 물어 보아야만 정답이 구해 진다.

왕년에 잘 나가던 가수 전영우 (예명 전 항)를 되돌이켜 본다. 이 친구는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 하면서 지금도 교수하는 엄정행과 동기로 같은 전공이었고 이 둘 이는 같이 ROTC

3기 후보생이었다. 영우는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여 엄 교수 보다는 더 더욱 촉망 받는

학생이었다.

문제는 우연치 않게도 영우의 장난 끼로 발동이 걸렸는데, 라디오 시절 64년 도에 MBC

방송의 노래 자랑에 참가해 본 것이 년말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는 바람에 “가수

證”을 받고 나서 여기 저기에서 불러 다니기 시작 하다가 진짜 연예계 가수가 되어버린

경우이다.

그냥 차분히 학교 생활하고 사회에 진출하였더라면 엄정행이 보다는 더 잘 나가는 성악

교수로 지낼 수 있었는데 당시에 TBC-TV의 아나운서 하던 마나님하고 지금의 미국

생활보다 편안하게 살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또 다른 경우의 가수 “한상일”의 경우는 서울공대 건축과 출신인데 노래의 끼를 못 이겨

건축 공학도를 접었던 친구였으나, 자기 동기들이 부장 시절에 현대건설에 대리로 입사한

경우가 있다.

마나님과 아이들하고 생활 시간 帶가 맞지 않아서 일대 변혁을 결심하고 代理라는 벼슬이

중요치 않다는 작정으로 자기 본명인 “한재상”을 되 찾아서 열심히 산 경우이다. 이 친구는

본래의 자질을 차츰 인정을 받아 나중에 계열사의 중역까지 하였다.

우리 51회 중에서 山 쟁이로는 故 “이웅일”이가 空岩이 유도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경탄할 실력을 가졌을 때부터 山을 좋아한 벗이였다. 이 친구가 연대 의대에 들어가서 중도에

의학을 제 팔자에 따라 (?) 포기하고 말았었다.

설악산이라면 이 친구처럼 많이 오르고 자세히 알고 있는 친구는 없었는데 그리고 체격 조건

으로 보아도 이 친구처럼 장수의 체질을 가진 친구도 드물었었는데, 일은 어느 날 한 동네에

사는 아우가 정선 산 자락에 집 한 채를 사 가지고 도배까지 한 상태에서 “집 들이” 초청을

받게 되자 같은 동네에 사는 개인 택시 하는 친구까지 동행을 하게 된다.

때는 지금처럼 초 가을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집들이에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번개 탄에다

십구공탄까지 넉넉하게 준비하여 가지고 새로 단장된 집에 도착하니 너무 상쾌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장소와 별장(?)에 도취하여 따뜻하게 아궁이에 연탄을 지피고 쐬주를 한 껏

즐기고 다음 날 아침 부지런히 설악산에 오르기로 하고 잠을 자게 된다.

잠을 자고 난지 사흘 만에 산에 오르던 등산객이 물이라도 얻어 먹을 양으로 그 집에 인기척을

하여 보지만 이미 이들은 영면 중이었다. 다행히 주민증이 발견되어 집으로 연락이 닿게 되었는데, 경찰의 전갈인 즉, 산중에서 변사체로 발견 되었기 때문에 검찰에서 부검을 하여 본

후에 자연사로 판명이 되어야 시신이 옮겨 진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사직동 팀장이었던 지금의 함양 군수 덕으로 복잡한 절차 없이 강남 세브란스 영안실로

옮겨져 자기 숙부인 그 곳 의사의 확인을 받고서야 영면의 길로 편안히 가게 되었었다.

웅일아, 연탄 가스 중독이 신문에만 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 네 죄였구나 (!) 고 것 하나만

조심 했어도 요즘 산행 길 사진에서 너를 자주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여러 친구들이 부러워

할 터인데, …

2006년 10월 31일 09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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