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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쿠먼
좋은 것만 찾아 다니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일상 생활을 긍정적인 사고로 접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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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石 컬럼'에 해당되는 글 49

  1. 2008.02.14 ‘ 四柱 八字 · 六 ’
  2. 2008.02.11 ‘ 四柱 八字 · 五 ’
  3. 2008.02.08 ‘四 柱 八字 · 四 ’
  4. 2008.02.06 “꼬맹이” 觀察 記
2008. 2. 14. 15:31 一石 컬럼
‘ 四柱 八字 · 六 ’


박통 시절에 최 長壽로 각료에서 총리까지 지내신 분이 남덕우 翁이시다.
이 어른은 옛날 효자동에 있던 “국민대학”의 정치학과 출신으로 미국 오크라호마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끝내시고 국민대학에서 교수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69년에 재무부 장관으로 출발 ‘82년의 국무총리까지 역임하신 어른으로 당시 각료 중에서 골프를 제일 잘 쳤다고 들었는데 박통과 한 팀으로 운동을 하게 되면 늘 박통 공 가까이 쳐 놓아서 제일 길게 맘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한다.


요직만을 거쳐 제일 장수한 분으로 잡음 없이 무탈하며 아직도 원로로서의 대접을 받고 계시다. 최근에는 국민대학교도 서울대학 범주 안에 들어서

훌륭한 학교이지만 ‘50년대의 국민대학은 운동장도 없는 단과 대학이었는데 내 놓으라 하는 브레인들을 제끼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핵심을 거의

도맡아 한 어른이시다.


요즈음 대학 입시생을 둔 부모들이 뭔 가를 깨달아야 하는데 지 새끼 비싼 과외만 시키면 세상 출세를 한다는 발상을 버려야 하는데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요즘 젊은 부모들은 어린이가 유치원 전에 다니는 “놀이방”에서 영어를 돈 쳐 발라가며 가르치면 그게 자랑스러워 하는 시대인 모양이다.


실제로 한글도 깨우치기 전에 미국 애들한테 놀이방에서 미국 말을 배우면 그게 대단한 밑천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나 “아니 올씨다”이다.

내 집안에 조카 둘이서 어렸을 때 일본에서 오년을 살고 서울 와서 초등

학교에 다녔을 때에 집에 가보면 “NHK” TV를 보면서 자랐는데 서울에서 일본어가 쓰여지지 않으며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거의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리라” 바로 이것이다.

외국어라는 것은 누구나 자기에게 꼭 필요할 때에는 대단히 쉽게 배워지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쉬운 예로 우리나라에 와서 취업하여 있는 근로자들을 보면 다들 특정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들 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우리말을

구사하고 있는 것들은 자주 TV 방송에서 볼 수가 있고,

가까운 동남아 여행을 가보면 현지 관광 안내원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의 말을 배우기 전에 그들이 아주 유창하게 우리 말을 해

주니까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80년대 초반 어느 신년 하례회에 끌려가서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공보처장을 히던 혜화정에 살고 계시던 오재경 선생 내외분과 한 테이블에서 초면을 했었는데,

이 냥반 말씀이, "영어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이 박사 임종을 곁에서 본 유일한 사람인데 이 냥반이 운명 세달 전 부터는 영어를 한 마디도 아니 하셨거니와 못 알아 들으셨다" 는 것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인근 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은 사주가 없다. 여권에도 생년월일 난에 그냥 년도만 적혀 있어도 그 동네에서는 별로 흠이 아니다.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면 그 마저도 대략이라는 말이 꼭 전치하여 대답한다. 그 대신 자기가 태어 난해에 몹시 소나기가 내렸던 해라고 자기 어른으로부터 들었다며 기억을 하는 버릇이 있다.

“알라는 위대하며 유일한 神이다” 를 철저하게 믿는 이들에게는 “IBM” 이라는 철칙이 있는데,

“Inshalla” = 모든 일이 알라 신의 뜻이다,

“Buchra” = 내일이라는 말로 급할 게 없다는 말이다.

“Maaleshi” = Never mind. 라는 뜻으로 괜찮으니 잊어 버려라는 말 대신

쓰인다.


이들에게는 사주가 없으니 팔자를 풀어 볼 방법이 없으나, 다른 통계적인 “手相”, “觀相”, “骨相”으로 풀이가 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사주를 기본으로 하고서 보아야 정답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다.

陰陽五行 (Yin & Yang School) 說은 우리 생활에 아주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 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이다.

좋을 “好”는 여자와 남자가 붙어 있는 表意 文字로 음양의 合이지만 떼어 놓으면 陰만 들어있는 나 홀로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늘 사사

건건 충돌을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내가 아무리 흠 있는 짓을 하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덮어주는 친구가 있다.

전자는 상극 관계이고 후자는 상생의 관계로 보면 되는데, 이 음양오행설은 한방에서도 아주 널리 쓰이고 있다. 조금은 지루하게 읽혀지는 벗들이 있겠으나 간략하게 내 짧은 지식을 다음에 나열 해보고자 한다.

팔자를 개선하여 나갈 수 있는 지혜로 본다.

2006년 10월 14일 0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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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11. 10:58 一石 컬럼
‘ 四柱 八字 · 五 ’

때는 60 년 4 월 18 일 서울 시내 고교생들이 대학생들의 피 묻은 깃발을

보고 시내로 경무대로 몰켜 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수 없이 많았고, 이들은 모두 다 지 팔자대로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았어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당시 고 3 용케도 불 자동차에 올라탔고 그 차는 경무대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효자동 못 밑 처에서 차는 정지를 하였고 거기엔 죽은 학생이 여러 명이었으나 그 젊은이는 몸에 총상 다섯 발을 맞은지도 모르고 차에서 뛰어내려 골목을 향하여 질주하였다.

어째건 같은 골목으로 뛰어가던 고대생들이 한참 도망(?)을 가고 있던 중

그 고3생이 피투성이가 된 걸 보고 부축을 하던 중에 당시의 “LIFE” 誌

사진 기자가 요청하여 어느 벽돌 담 앞에서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 사진은 바로 라이프 지에 실려 사진 기자는 상을 타게 되었고.

그 학생은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는데 총 한 발에 세상을 떠나 수유리 묘역에 누워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분은 5.16 후에 고교 출신으로 당시 내각 사무처에서 특채하여 내무부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말단 공무원이 야간 대학을 졸업하면서 열심히 근무하여 경기도의 군수

두 곳을 거쳐 한 도시의 시장까지 진출하다가 선출 직으로 바뀌면서 부시장을 몇 곳 거치고 38년 만에 정년으로 퇴임을 한 사람이 내 가까운 인척 중에 있는데, 매 해 4.19 날에는 그 때 그 인물이라는 제하에 나이 들어 가는 모습이 당시의 고대생과 함께 신문에 실리고 있다.


나는 젊은 시절 명절에 처가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었다. 처가에서는

명절이면 늘 처 백부 댁에서 모이곤 하였는데 사촌 동서 되는 이가 제주

대학 법과를 나와 제주고등학교 수학 선생을 하다가 일본으로 밀항 ?

붙잡혀서 오무라 수용소에서 얼마간 살다가 제주로 되돌아와서는 막판이라는 결심으로

절에 들어가 여섯 달 고등고시 사법시험을 준비하여 직방으로 최종 합격

까지 한 제주 출신으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데, 내가 사원 시절에

서울 지법의 판사로 있었다.

나는 과장 시절까지는 이 친구가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어른들 앞에서 내가 위축되는 걸 느꼈기에 그것이 싫었기에 안 가려고 핑계를 만들고 싶어하였었다. "서울에서 법 쪼가리 한 사위는 회사 사원이고 제주도에서 공부한

사위는 판사" - 이런 말이 이명 현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외생활을 십여 년을 하였기에 한 동안은 조우하는 것이 뜸하다가

어느 해에 내게 한 말이, 괜히 힘든 고시하고 나서의 사회생활이 후회

스럽다 하였는데 이유인 즉, 가정 생활이라는 게 애들하고 놀아 줄 여유가 없고 거의 집에서의 시간을 책상 끼고 앉아서 판결문 쓰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외국에 구경 나갈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냥반이 우리나라 법조계에서는 윤관 대법원장 시절에 제일 처음으로

정년 (38년 봉직) 퇴직을 한 분이고 지금은 모 로 펌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의 동생 하나는 40대 중반에 약방에서 지어 준 감기약 먹고서 비명

횡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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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8. 05:38 一石 컬럼
‘ 柱 八字 · 四 ’


6.25 전쟁으로 早失 父母한 젊은이가 신체 건장하고 깡다구 좋고 쌈박질도 잘하던 그는 종로통의 어깨 조직에 들어가서 학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 당시의 큰 형님 뻘 되는 “임화수”의 눈에 띄어 그 조직에서 해방되고 학비 등의 개인 후원으로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고,

일찍어니 현대에 들어와서 노력을 한 결과로 플란트 사업 본부장까지 지냈고 마나님은 이대 부속병원에서 방사선과 의사하던 분이었다. 의사하는

마나님은 팔자에 따라(?) 첫 번에 딸 쌍둥이를 낳았으나 한 아가는 영아적에 세상을 등졌었다.

나도 이 양반 따라 해외 입찰에 출장도 여러 번 같이 다닌 일들이 있어서

아주 친하게 지낸 분이었는데,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인근에서 폭파된 KAL 858기 (바그다드 발 바레인 경유 김포 노선)에 탑승하는 바람에

너무나 아까운 生을 동료 직원 셋과 함께 이승을 져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그는 11 월 30일 바그다드를 출발 할 예정이었으나

한시라도 본사에 부지런히 들어가서 일을 하려는 욕심으로 여정을 변경

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죄 없는 사람들이 빨갱이들에 의한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115명이라는 많은 이들이 단 한 방에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도
八字論에 해당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본래의 예정대로 했으면 무탈할 것을
회장의 氣質을 벼슬이 커질수록 닮아간 것도 팔자일 가는 정답을 모르겠다.

내가 계동에서 일하고 있었으면 그와 같이 동행을 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완벽하였었을 것이나, 길 永에 이을 承이라는 이름 값을 하지 않었는

가도 싶다.

미국 기업의 중요 간부들은 절대로 같은 비행기로 출장을 같은 목적의 업무 라도 다들 흩어져 비행 일정을 달리하여 목적지에서 합류하는 것이 관행

으로 되어 있으나 7/80년대의 한국 기업에서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 는데 요즘에는 기업들이 커졌으니 조금 달라졌는 지는 모르겠다.

故 정주영 회장의 맏 아들 故 夢必 씨가 우여곡절 끝에 거의 마지막 기회로 알고 인천 제철 사장으로 일하고 있을 즈음에 노태우 육군 대장이 막 전역

하여 있을 때인데, 회장은 노 장군을 매일 아침 일찍이 구 서울 고교 교정의 정구장에서 운동을 내무장관 가기 전까지함께 하였었다.

영감님이 맏 아들의 앞을 위하여 그 정구장 운동에 참석 시키는 엄명을 내려서 몽필씨는 꼬박 꼬박 열심히 부친과 노 장군에게 아침마다 눈 도장을 찍었었다.

82년 사월 사고 하루 전날에 몽필 사장은 회사 손님을 부산에서 접대하고 나서 서울 고교 정구장에 시간 맞추어 운동을 하기 위하여 오 밤중에 부산을 출발하여 상경하던 중에 대형 트레일러의 옆구리를 들이 받아서 운전 기사와 같이 참사를 당하였다. 묘한 것이 그 트레일러는 정거 중이었고 또 인천 제철의 차량이었던 것이다.

해석이야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하면 되지만 47세의 나이인데 아버지 엄명에 하루 빠져야 하겠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생전에 아니하던 걸 버릇으로 만들려 다가 생겼던 일이었다고 그려진다.

지금 고려화학 정상영 회장과는 동갑 네로 자랐기에 밖에서는 어려서 같이 놀 때엔 서로 이놈 저놈 싸우다가도 집안에서는 깎듯이 막내 삼촌으로 대접 하였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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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觀察 記




우리 집 꼬맹이가 소파에 방석을 너 댓 개를 받쳐 놓고서야 사진 한 점 찍을 수 있던 녀석이 지난 번 집안의 행사에 거동을 하였는데, 아(!)

욘석이 바닥에 손만 짚으면 벌떡 일어나 즈네 집에서 못 보던 것 투성이라, 뭐부터 잡아서 입에 물고 감정을 할 꺼나 여기 저기를 관찰한 후에 지 맘대로 돌아다니다가 지 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면 들어 만져 보고는 입에 넣어본다.


앉아있다가 일어나는 동작은 나보다 훨씬 유연하고 쉽게 그리고 빠르다.


분명한 어휘는 기껏해야 한 음절에서 두 음절의 다섯 마디인데 지 누나도 그 나이에 못하던 “밥”을 소리 내는데, 입에 음식을 삼키고 나면 “밥 !”이라 소리 친다. 말을 못할 뿐이지 지 양이 차면 고개를 돌려버려 거절한다.


언어가 없이도 지 의사 표시는 훌륭하게 해내는 것이 “wonder” 그 자체이다. 누구 어디 있냐 물으면 시선을 돌려서 응답한다.


태중에 있을 때 즈이 엄마가 한약 중에 태아 보약을 먹어서인지 큰 애 보다는 걸음마가 달포나 빠르고 벌써 아래 이(齒)가 셋이나 났다. 지 누나가 감기가 들어도 욘석은 꺼떡 하지 않는다.


꼬맹이가 혼자서 이것 저것을 찾아서 자기 시간을 지 나름대로 중얼대면서 바쁘게 놀 줄을 안다. 그리고 심심해지면 한 잠을 잔다. 잠을 자고 싶으면 즈이 엄마 무릎을 찾아서 칭얼댄다. 젖 내 놓으란 이야기다. 그게 잠 버릇이다. 영어로 보디 랭귀지에 숙달되어 있다.


혼자서 잘 놀다가 가만이 서있는 자세에서 힘을 쓰는 표정이 나오면 뭔가를 아래에서 내보내는 동작인데, 힘을 써도 잘 안 나가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면 꼬맹이 엄마는 옆에서 “으응가” 하고 소리 내어 주면 쉽게 작업을 끝낸다. 금새 방긋하며 치워달라는 표정이 나온다.


온 세상이 꼬맹이에게는 요순 시절이다.




2006년 12월 23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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